기억할만한지나침

배수아,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자음과모음, 2013.

시월의숲 2013. 7. 16. 23:43

"그리고 주로 공연이 끝난 다음, 저녁때 오디오 기기를 끈 다음에 들려온다는 거죠?"

"네"

"그러면 혹시 뒤에 남게 된 소리의 그림자가 아닐까요"

"소리의 그림자라면?"

"알려지지 않은 목소리 같은 것."(10~11쪽)

 

 

 

*

 

 

 

두터운 시멘트 건물 벽면과 육중한 철제와 거대한 유리 시설물, 대지 전체를 뒤덮은 뜨거운 아스팔트에서는 이글거리는 화장장의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드러난 살과 피부, 눈동자와 털과 같은 온갖 동물성 유기물들이 땀과 함께 열기에 연소되면서 거리는 온통 분화구처럼 움푹한 화염의 구덩이로 변했다. 어느 방향으로 얼굴을 돌려도 수천 개의 불화살이 눈과 피부에 치명적인 화상을 입혔다. 수천 개의 별들이 동시에 폭발했다. 유성들이 불타고 가스가 연소하며 어두운 재가 천체의 궁륭에 달라붙었다. 모든 빛이 차단되었다. 밤이 발생했다. 그러나 더위는 물러가지 않았다. 육체의 조직과 조직을 이어주는 점성질의 섬유들은 밤이면 더욱 느슨하게 이완되었고 흐느적거리며 의식의 가장자리를 맴돌았다. 잠의 세포는 아이덴티티를 잃었다. 정체성의 암호가 풀렸다. 잠의 세포막이 와해되면서 혼수와 꿈이 뒤섞였다. 그것은 일 년 중 가장 엷고 희박하며 확장된 잠의 시기였다. 그에 반해서 비중과 농도가 가장 강렬해진 꿈의 콜로이드가 지배하는 시기였다. 꿈속에서 아야미는 가슴에 커다란 앵무새를 안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차가운 물이 담긴 욕조 속으로 기어들어가 잠들곤 했다. 앵무새가 그녀의 가슴을 발톱으로 파면서 아주 크고 길게 소의 울음소리를 냈다. 인위적인 거대 냉방 기계 장치로 인해 한없이 증폭된 도시의 더위는 비통하면서도 초월적인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한여름의 대도시는 수천 년 전 열대의 컬트 종족이 세워놓고 사라져버린 혼몽의 사원이었다. 희박한 잠은 뜨끈하게 데워진 재와 증기로 가득 찬 화산 연못으로 육신을 끌고 들어갔다. 검은 비누 성분의 재는 끈적하고 미끈거렸으며 구멍이 숭숭 뚫린 크고 작은 회색의 부석들이 몸의 부유를 방해했다. 창문을 열면 흠뻑 젖은 담요보다도 더 묵직하고 둔중한 더운 공기가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는 좁다란 방 하나짜리 집 안으로 뜨거운 살덩이처럼 밀려들었으며 창문을 닫으면 산소가 무서운 기세로 휘발되어버렸다. 마침내 대기는 오직 온도로만 가득 찼다. 마침내 대기는 오직 파탄의 엑스터시로만 가득 찼다. 팔월의 침대는 달구어진 늪지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 기둥이었다. 그 안에서 죽은 한 선조 여자의 기억이었다. 펄펄 끓는 늪지에서 상승한 고통스러운 몽상의 제국이 팔월의 도시 위로 둥실 떠올랐다. 사람들의 꿈을 잠식했다. 한여름의 체온보다 더 뜨거운 공기는 투명하고 견고한 총알이 되어 아주 느린 속도로 더운 심장에서 심장으로 관통하며 여행했다. 보이지 않는 납의 결정이 매순간 피부를 파열하고 살갗을 꿰뚫었다. 타들어가는 살덩이. 화상으로 너덜너덜해진 점막. 호흡은 절망으로 가는 기관차였다. 그들은 잠자리에 들 때마다 참혹할 정도로 땀에 흠뻑 젖었다. 그들의 육신은 속에서부터 천천히 불타는 석탄이었다. 화염 없이 이글거리며 느리게 밤새도록 오래오래 타올랐다. 한낮 가장 뜨거운 시각이면 그는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를 마셨고 그녀는 오이를 먹었다. 선반 위에 놓인 상자 모양의 노란색 라디오를 켜면 항상 일기에 관한 보도만이 흘러나왔다. 남자 배우가 아주 느린 목소리로 억양 없이 한 음절 한 음절을 끊어가며 원고를 읽었다. 한낮의. 기온. 섭씨. 삼십. 구도. 바람. 없음. 그늘. 없음. 화상의. 위험. 삼십. 구도. 바람. 없음. 그늘. 없음. 한낮의. 도시. 신기루. 현상이. 나타날. 예정. 아스팔트와. 타이어의. 융해. 바람. 없음. 구름. 없음. 점막의. 화상. 위험. 하늘과. 대기의. 색깔. 없음……. 햇빛 드는 창가에 내다놓은 초는 불을 붙이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녹아서 흐물거렸다. 촛대가 쪼그라들면서 슬프게 구부러졌다. 그 모습은 불가피하게 사랑의 종말을 알렸다. 열대의 시간이 끝나갈 즈음 그들은 재만 남았다. 그들은 불투명한 회색빛 유령이 되었다.(2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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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면 우리는 너무나 고립되어버리지 않을까요? 단 한 사람도 설득할 수 없다면, 그 누구도 설득하지 못하고, 또한 그 누구도 우리의 무덤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혼자서 고개를 돌리고 아주 멀리 가버려야 한다는 의미잖아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는 채 말이죠. 우리는 평생 동안 황야에서 양들과 별들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별들은 죽고 다시 태어나고, 양들도 마찬가지겠죠. 그러면 당신은 세상은 변함이 없노라고 말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타인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슬픈 자의식조차도 마침내 느끼지 않게 된다면, 그건 너무나 고독해요, 아야미."

"그렇다면 고독하기 때문에 타인을 설득해야 한단 말인가요?"

"왜내하면 고독은 실패이기 때문이죠."(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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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는 그 존재가 지배하지 못하는 비가시적인 영역과 성분이 있다. 그것이 사물의 비밀을 구성한다. 사진의 마법은 찍는 자와 찍히는 자 모두의 의지와 무관한, 매우 고요하고 정적인 경악이 깃들어 있다는 점이다.(148~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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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줘요." 아야미는 기우뚱거리며 사람 사이로 멀어져 가는 늙은 시인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리듯이, 혹은 애원하듯이 말했다. "지금 당신이 가고 있는 그 다른 세계로 나를 데려다줘요."(185~1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