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내가 멈추므로, 나는 더 이상 쓰지 않는다

시월의숲 2014. 8. 15. 17:34

나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어떤 미묘한 빛의 효과가 있었거나 아니면 어떤 불특정한 소리가 들려왔다. 혹은 우연히 나를 스치고 지나갔던 어느 향기가 떠올랐거나 알 수 없는 외부의 영향이 있었거나 아니면 불현듯 내 귀에 되살아난 어떤 멜로디가 있었다. 이런 불명확한 요소들이 나에게 영감을 주어 나로 하여금 지금 커피하우스에 편안하고 느긋하게 앉아 이 글을 쓰게 만든다. 내가 원래는 무엇을 생각하려고 했는지, 혹은 생각의 방향을 어느 쪽으로 잡으려 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가벼운 안개가 대기 중에 퍼져 있는 축축하고 따스한 날이다. 슬픔의 날이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으며, 오직 한없이 단조로운 날. 그 무엇이라고 규명하기 어려운 느낌이 나를 아프게 한다. 내게는 논지가 부족하다. 무엇을 위한 논지인지는 알 수 없다. 내 신경계에는 의지가 없다. 내 자의식의 저변에는 슬픔이 있다. 신중함이 부족한 이런 글들을 종이에 옮겨 적고 있는 것은 이런저런 것들을 말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단지 나 자신의 산만함과 무관심을 어딘가에 집중시키기 위해서다. 뭉툭한 연필의 부드러운 필체로 나는 흰색 샌드위치 포장지를 어느새 가득 채워 나간다.  그 포장지는 내가 식사로 주문한 샌드위치를 싸고 있던 것이며, 나는 뭉툭해진 연필을 뽀족하게 깎을 만큼 충분히 감상적이지 않다. 글을 쓰기 위해서 이보다 더 나은 종이는 필요없다. 오직 흰색이기만 하면 된다. 나는 만족스럽다. 등을 의자에 기대고 앉는다. 하루는 저물어간다. 비도 없이 단조롭게, 흐릿하고 불확실한 저녁의 색조속으로…. 나는 글쓰기를 멈춘다. 내가 멈추므로, 나는 더 이상 쓰지 않는다.(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135~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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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나 자신의 산만함과 무관심을 어딘가에 집중시키기 위해서 글을 쓴다. 내 글은 신중함이 부족하고, 내 의식의 저변에는 슬픔이 있다. 어떤 불명확한 요소들이 나에게 영감을 준다. 나는 어쩐지 페르난두 페소아를 알 것만 같다. 커피하우스에 앉아 샌드위치를 싼 흰색 포장지 위에 뭉툭한 연필로 글을 쓰고 있는 페소아. 그가 무려 백 년도 전에 이러한 글을 썼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 글이 위대해서가 아니다. 그런 것은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그가 글로 남긴 생각들에 대해서 말할 뿐이다. 사물에 대한 인식, 영감, 느낌,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방식 같은 것들. 페소아의 글을 읽다 보면 그가 백 년 전의 이국 땅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러한 글들을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끊임없이 써왔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쓸 수밖에 없는 이유, 수많은 필명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아픔을 느끼는, 무엇이라고 규명하기 어려운 느낌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쩐지 페르난두 페소아를 알 수 없을 것만 같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고, 불명확한 것은 불명확하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일까. <불안의 서>를 아직 다 읽지 않았다. 아마도 천천히 읽어야 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