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삶을 살 줄 모르는 사람

시월의숲 2014. 9. 17. 00:06

나처럼 존재하는 사람, 삶을 살 줄 모르는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와 같은 유형의 극소수의 인간에게는 일반적인 삶의 양식을 포기하고 오직 관조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종교적인 삶이 무엇인지 모르며, 알 수도 없다. 인간은 이성으로 신을 믿는 것이 아니고 추상적인 믿음 자체가 불가능한데다 추상적인 대상과 어떻게 교류를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른다.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삶을 미학의 대상으로 관조하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성대한 축제의 분위기를 외면하고, 신들에게는 냉담을 인간에게는 경멸을 던지며, 우리는 그 어떤 의도도 없이 오직 느낌에 탐닉한다. 의미는 없어도 좋다. 우리의 뇌신경이 원하는 대로, 느낌이 더욱 우아하게 정화된 쾌락의 형태가 되도록 돌볼 뿐이다.(23~24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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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내 삶의 대부분을 '살 줄 모르는' 상태로 살아온 기분이 든다. 내가 체념이 빠른 이유도 아마 페소아처럼, '일반적인 삶의 양식을 포기하고 오직 관조를 운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살 줄 모르는 삶을 위하여. 그래서 내 삶엔 의미가 사라졌다. 의미가 없어도 사람은 살 수 있다. 아니, 살아진다. 하지만 나는 궁금하다. '살 줄 아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삶을 살 줄 안다면 그는 두 번째의 삶을 사는 것인가? 하지만 모든 삶은 한 번 뿐이지 않는가. 한 번 뿐인 삶을 어떻게 살 줄 안다는 말일까.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인가? 하지만 내 이런 의문도 고개를 들어 거리를 바라보면 말끔히 해소되는 것 같다. 주위엔 온통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뿐이다. 그들은 모두 세상에서 자신들이 제일 행복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안다. 혹시라도 행복한 순간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전체 삶에서 볼 때 지극히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고, 그 나머지 시간은 고통과 절망의 신음 속에서 살아간다고. 그들이 행복을 과장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행복한 순간이여 돌아오라! 그들은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낭만주의자는 말하리라. 지극히 짧았지만, 인생의 빛났던 한 순간의 기억만으로도 인간은 나머지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미적지근한 타협과 체념의 산물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