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의미도 생각도 없는 무의식과 재앙

시월의숲 2014. 9. 25. 21:29

눈앞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일도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내 운명의 눈에는 낯설기만 하다. 심지어 운명 자체도 이들을 모른다. 우연이 던져놓은 돌멩이이며 모르는 목소리의 메아리다. 의미도 생각도 없는 무의식과 재앙이 한꺼번에 뒤섞여 있다. 이것이 삶이다.(29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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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도 생각도 없는 무의식과 재앙이 뒤섞인 삶. 나는 그 부분에서 눈이 크게 떠졌다. 요즘의 내 삶이 그러하고, 지난 날의 내 삶도 그러했으며, 앞으로의 내 삶 또한 그러하리라는 예감. 불길하다는 느낌도, 두렵다는 의식조차 없다. 페소아의 글을 읽다보면 지독한 허무함과 냉소의 저변에 절망 아닌 절망이, 유머 아닌 유머가 있음을 느낀다. 그건 이 책의 발문을 쓴 김소연의 말대로 페소아가 지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능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지만, 원하지 않음을 원하고, 때로 자신이 유명해지는 상상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모순적인 어떤 것. 부조리한 어떤 것. 허무함과 고독과 절망과 재앙같은 삶 속에서도 살아있고, 살아가야 하는 자가 숙명적으로 지녀야 하는 어떤 것.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그것'이 페소아의 글에는 있다. 그래서 그는 '우연이 던져놓은 돌멩이'를 보고, '모르는 목소리의 메아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 삶을 산다. 의미도 생각도 없는 무의식과 재앙이 뒤섞인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