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제발트, 《현기증, 감정들》, 문학동네, 2014.

시월의숲 2016. 2. 22. 22:00

나는 테라스의 열린 문 근처 탁자에 앉아 그간 기록한 메모들과 짧은 스케치들을 펼쳐놓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로 무관하게 일어난 사건들, 그렇지만 나에게는 동일한 기운의 영향 아래 일어났다고 보이는 사건들의 은밀한 교류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9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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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발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기억을 불러내오는 독특한 기술에 매혹되곤 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시간을 기억하고, 자료와 문헌을 통해서 기억하고, 타인의 기억을 통해서 기억하고, 아무런 설명이 없는 사진과 사물을 통해서 기억하고, 수백 년 전의 일기를 통해서 기억하고, 스스로 영원히 방랑하는 사냥꾼 그라쿠스가 되어 기억하고, 그리고 때로는 아무런 기억이 없는 한 장의 사진에서, 기억을 창조해내기도 한다.(254쪽,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