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헤르만 헤세, 《헤세가 사랑한 순간들》, 을유문화사, 2015.

시월의숲 2016. 3. 13. 14:52

외국의 풍광과 도시를 직면할 때 유명하거나 눈에 확 들어오는 것만 찾지 않고 본원적이고 좀 더 심오한 것을 발견하고 사랑으로 이해하려는 여행자들이 있다. 그런 사람의 기억에는 대게 우연히 마주친 작은 사건들이 특별한 광채를 빛내며 담겨 있기 마련이다.(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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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 미니아토를 떠올렸다. 피렌체 대성당의 종탑과 돔형 지붕에 대해서, 그리고 나를 그 예술 작품들로 향하게 만든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것들은 왜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걸까?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한 인간의 고된 작업과 헌신은 무가치하지 않으며, 모든 인간들이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각자의 고독 너머에, 인류 공통의, 바람직하고 귀하고 소중한 보편성이 존재함을 깨닫기 때문이다. 오랜 시대를 거쳐 오는 동안 수백 명의 예술가들이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이러한 보편성에 가시적인 형체를 부여하기 위하여 고독한 작업에 몰두했다. 수백 년 전, 예술가와 제자들이 삶의 다른 것을 포기한 채 구준한 작업으로 이룩해 놓은 것이 그 당시나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영감을 주고 있다면, 오늘 우리가 글을 쓰거나 다른 가능한 일에 생애를 바치면서 겪는 고독과 나약함 또한 전부 헛되지만은 않을 것이다.(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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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느낌, 한 때 고향을 가졌었다는, 그 느낌! 한때 나는 세상의 어느 작은 장소에 있는 모든 집들과 모든 창들과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한때 나는 이 세상의 어느 특정 장소와 연결되어 있었다. 뿌리와 생명으로 자신의 장소와 연결되어 있는 한 그루 나무처럼!(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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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서히 나아갔다. 수로는 점점 좁아지고 얕아졌다. 물가의 오두막들은 어느덧 자취를 감추었고 초록색 늪지와 우거진 수풀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소리 없이 고요한 세계였다. 나무들이 물가에, 그리고 물속에 뿌리를 내린 채 서 있었다.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나무들은 은밀하게 수가 늘어났으며, 수천 겹으로 뒤엉킨 뿌리들을 내뻗어 우리를 뒤쫓아 왔다. 우리의 머리 위에는 나뭇잎과 가지들이 우거져 초록의 궁형 지붕을 이루었고, 그것은 점점 더 무성하고 빽빽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더 이상 나무들을 한 그루 한 그루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뿌리와 뿌리, 가지와 가지가 뒤엉킨 나무들은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었고, 서로 얽히며 무섭게 번식한 수백여 종의 양치류와 덩굴, 갖가지 기생식물들이 그 위를 뒤덮었다.(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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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더욱 아름다워졌다. 나는 혼자지만, 혼자라는 사실을 괴로워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소망하지 않는다. 가만히 누워 햇빛에 온몸이 빨갛게 익도록 내버려 둘 뿐이다. 익을 대로 익어서 성숙해지기를 열망할 뿐이다. 나는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날 준비 또한 되어 있다.

세계는 더욱 아름다워졌다.(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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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나는 다른 지붕을, 다른 오두막을 사랑하게 되리라. 사랑의 편지에서 흔히 쓰이는 문구와는 달리, 나는 내 마음을 이곳에 두고 떠나지 않는다. 절대로 아니다. 나는 마음을 갖고 길을 떠난다. 산 너머 저 먼 땅에 가서 살 때는 나는 마음이 필요하다. 나는 유목민이지 농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불충과 변덕 그리고 환상의 숭배자다. 세상의 어느 작은 부분에 내 사랑을 못 박아 두면서 자랑스러워하지 않으리라.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대상은 오직 은유일 뿐이다. 우리의 사랑이 정주하게 된다면, 우리의 사랑이 성실과 미덕으로 바뀐다면, 그러면 나는 그 사랑을 의심하리라.(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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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부터 습기 머금은 축축한 바람이 불어온다. 저 너머 높고 푸른 산봉우리들이 다른 나라의 땅들을 굽어본다. 그곳의 하늘 아래서 나는 행복하리라. 그리고 고향을 그리워하리라. 나와 같은 방랑자, 그 중에서도 완전한 방랑자는 아마도 향수를 앓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향을 그리워한다. 나는 완전하지 못하며 완전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나는 기쁨을 향유하듯이 그리움을 향유한다.(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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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경험했던 일이 어느 순간 생소하게 변하면서 기억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아닌가! 그리하여 수많은 경험들로 이루어진 몇 년이란 시간도, 마치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완전히 망각되어 버리기도 한다.…그러나 언젠가 산책길에서, 혹은 어느 가치 여행 중에, 혹은 잠 못 이루던 어느 날 밤에, 그동안 잊고 있던 생의 한 부분이 갑자기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무대 위에서 벌이지는 것처럼 소소한 사건들 하나하나, 사람들의 이름과 장소, 소리와 냄새까지도 모두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이다.(122~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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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중이었어. 그렇지? 그러니까 사랑이 무엇이냐?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것, 요즘은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사실은 그게 가장 아름다운 행위인데 말이야. 아니, 내 말을 막지마! 나는 두 사람이 만나서 입 맞추고, 같이 잠자고, 그리고 결혼하는 그런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게 아니야. 나는 사람의 일생에 단 한 번만 찾아오는, 그런 유일한 감정으로서의 사랑을 얘기하는 거야. 그런 사랑은 고독하지. 설사 그 사랑이, 흔히 하는 말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말이야. 그런 사랑에 빠지면 사람은 모든 욕망과 재산을 다 바쳐서 열정적으로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서 활활 타오르게 돼. 모든 희생이 그대로 쾌락 자체가 되어 버리는 거야. 그런 종류의 사랑은 행복해지기를 원하지 않아. 끝까지 다 타버리고, 고통을 겪고, 그리고 파멸하기를 원해. 그런 사랑은 불꽃이라서, 집어삼킬 수 있는 것이라면 최후의 한 조각까지 완전히 삼켜버리기 전에는 결코 죽는 법이 없어.(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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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인의 사랑을 얻는 데 성공했을 경우 그저 그런 작은 만족감이 전부였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절망적인 사랑에 빠져 고통받고, 두려움과 소심함에 시달리고, 불면의 밤을 보낼 때 정말로 훨씬 더 행복했습니다.(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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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직 현재적인 것, 오직 새롭고 가장 새로운 것만이 전부인 그런 정신은 견딜 수 없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적인 삶이란 있었던 것, 지나간 것, 오래되고 원초적인 것과의 지속적인 관계가 성립될 때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새로움에 흠뻑 젖어 있던 최초의 황홀함이 사라지자, 다시 오래된 낡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갈망이 나를 사로잡았다.(278~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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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언제나 나에게 가장 강렬한 설교자였다. 나무들이 숲이나 산에서 크고 작은 무리를 이루고 서 있을 때, 나는 그들을 숭배한다. 하지만 나무들이 각자 떨어져 오직 한 그루로 서 있을 때, 나는 그들을 더욱 숭배한다. 그럴 때 그들은 고독한 사람과 같다. 어떤 약점 때문에 몰래 도망쳐 온 은둔자가 아니라, 베토벤이나 니체처럼, 위대한 단독인 그런 고독의 인물 말이다. 나무의 높은 우듬지에는 세계가 술렁이고, 뿌리는 영원 안에서 고요하다. 하지만 나무들은 그러면서도 자신이라는 존재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온 기운을 다해서 한 가지를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다. 자신 안에 있는 고유한 법칙 이룩하기, 자신의 원래 모습 구축하기,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자신 나타내기. 한 그루의 아름답고 강한 나무보다 더 신성하고 더 이상적인 것은 없다.(3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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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이자 예술가로서의 내 본능은 공동의 고통, 공동의 자긍심, 공동의 증오, 공동의 명예에 도취될 줄 아는 인간의 능력을 경계하라고 항상 강력한 경고를 보내 왔습니다. 만약 어떤 방에서, 강당에서, 마을에서, 도시나 나라에서 위와 같은 후끈한 감정이 고조되는 흔적을 느낀다면, 내 마음은 순식간에 차가운 불신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나는 등줄기에 소름을 느낍니다. 바로 내 옆에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과 열광의 눈물을 그렁거리며 환호의 함성을 지르고 서로 얼싸안고 있는 와중에, 이미 내 눈앞에서는 흘러내린 피가 땅을 적시고 도시는 화염에 휩싸입니다.(3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