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나는 너를 산다

시월의숲 2016. 10. 31. 23:09

내가 아는 한 사람은 누군가와 마음을 다해 만날 때면 '사귄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산다'라고 이야기 한다. "나는 너를 산다" 그 말이 그렇게 근사할 수 없었다. 그 어떤 표현보다 진하게 들리는 '너를 산다'는 것은 어쩌면 여기가 아닌 그곳을 사는 여행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낯선 도시에 가서 사는 것. 긴 호흡으로 사는 여행이 불가능하다면 짧은 여행이더라도 일상적인 여행으로 여행의 방식을 바꾸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한동안 그곳에 살았다'라고 이야기할 것이다.(전소연, 『가만히 거닐다』, 북노마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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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을 만들고 일본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실제로 내가 그곳에 갈 수 있을 거라는 실감이 들지는 않지만, 어쨌든 나는 비행기표를 예매했고, 여권도 만들었다(가려고 비행기표까지 예매했으면서 왜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딱히 할말은 없지만, 암튼 내 기분이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실제로 갈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일단 그곳에 가는 비행기표를 예매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그곳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이건 좀 이상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곳인지 모른채 예매했다는 말인가?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곳이 어딘지 모르고(단순히 내가 가는 곳이 일본이라는 것만 안다), 어떤 역사와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어디를 봐야 하고, 무슨 음식을 먹어야 하며, 그곳의 기후와 사람들의 심성은 어떠한지 전혀 모른다. 순전히 우연에 의해 선택된 그곳을, 순전히 우연하게 만난 인연들과 함께 가게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지금 생각하면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그곳을 선택하게 되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항공권을 예매했다는 사실조차 믿기지 않는다. 이런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서관에 가서 그곳과 관련된 책을 빌려오기까지 했다. 같이 간 지인은 그곳의 관광명소와 먹거리 등 정보 위주의 책을 빌렸으나, 나는 그런 책에 전혀 흥미가 일지 않았다. 그래서 빌린 책이 사진 작가 전소연의 <가만히 거닐다>였다. 처음엔 이 책 또한 큰 흥미가 일지 않아서 며칠 동안 방 한 구석에 두고 잊고 있었는데, 오늘 갑자기 생각이 나서 책을 펼쳐들고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곳에 대한 정보 위주의 접근이 아니라 감성 위주로 접근하고 있었고, 나는 그 부분이 마음이 들었다. 파스텔톤의 사진 또한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곳은 그러니까,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곳이 아니라 유유자적, 산책을 하듯이 '가만히 거닐 수' 있는 곳이었다. 작가는 그곳을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살고' 왔다. 여행이란 어쩔 수 없이 피곤하고, 지치는 일이겠지만, 이 책의 저자처럼 느리게, 산책하듯 그곳을 살고 오는 것이라면, 그 어떤 여행의 방식보다도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장소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 나는 내가 예매한 일본에서의 여행이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지만, 첫 여행이 그러하듯 아마도 고요하지는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렇다면 내가 찾는 것은 고요를 찾아 떠나는 여행인가? 내가 실제로 그곳에 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어쨌거나 내가 그곳에 갈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나는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여행의 전부는 여행을 준비하고, 상상하는 그 과정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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