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내일의 나를 위해서

시월의숲 2016. 10. 16. 19:40

날씨가 많이 선선해졌습니다. 아직 정오의 햇볕은 따갑지만, 그늘에 들어서면 시원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 아, 이제 여름은 지나갔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하긴, 이제 시월도 중순을 지나고 있으니까요.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축제의 계절이기도 한가 봅니다. 주위의 이곳 저곳에서 축제가 시작되고, 끝나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축제가 있어도 즐기지 않으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지만, 축제를 즐기는 입장이 아니라 도와줘야 하는 입장이 되고 보니, 오히려 축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때가 더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봐요. 어제와 오늘, 이틀간 쉬지도 못하고 일을 하고 있으니 몸이 이완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내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그러니까 몸과 마음이 따로 떨어져서 서로를 처음 보는 것마냥 보고 있는 듯 생각되었습니다. 아마도 엊그제 마셨던 술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아니면 술을 마신 후, 찬 바람이 부는 길가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때 이후 몸이 조금씩 이상하더니, 급기야 오늘은 콧물에 재채기가 너무 심해서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였으니까요. 온 몸이 얻어 맞은 듯 아프고 몸에 열도 나는 것 같아,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덮고 약국에 가 약을 샀습니다. 때마침 비도 부슬부슬 내려서 약을 사러 가는 길이 더 서글프게 느껴지더군요. 집에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저녁으로 때울 컵라면과 핫도그를 샀어요. 사온 빵과 라면을 먹고, 천천히 약을 먹은 후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약기운이 빨리 퍼지기를 기다리면서 말이죠. 책을 읽어야 하는데, 요즘엔 정말 정신이 없어서 책을 읽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대신 음악이 듣고 싶어서 음반을 몇 개 구입했어요. 아, 최근에 배수아가 번역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계단 위의 여자>도 같이 구입했습니다. 요즘은 예전만큼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데, 몇 개의 음반과 책들이 나를 긴 침체의 늪에서 건져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발 그러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나저나 지금 몇 주 째 읽고 있는지 모를 오스카 와일드의 <심연으로부터>를 빨리 끝내야겠어요. 처음엔 빨리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쉽지가 않더군요. 어서 읽고 또 다른 책으로, 세상으로 건너가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나약한 몸에 달라붙은 감기 기운을 어서 떼어내야 할텐데. 그게 잘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좀 일찍 자야겠습니다. 내일의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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