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배수아,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테오리아, 2016.

시월의숲 2017. 2. 21. 18:20

험윤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커피를 만든다.

그가 커피를 만드는 방식은 매우 간단하다. 모든 종류의 커피머신을 싫어하는 그는 극도로 곱게 간 커피 가루를 스푼 가득히 세 번 커다란 잔에 담고 가스불로 펄펄 끓인 뜨거운 물을 조심스럽게 붓는다. 가루가 대부분 잔 바닥에 가라앉을 때까지 오 분 정도 기다린다. 그리고 두어 모금 정도 마신다. 커피는 충분히 진하지만 그 사이 식어 버렸으므로 아주 뜨겁지는 않다. 당연하게도 항상 약간의 커피 입자가 입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입안에 미세한 깔깔함이 항상 남아 있다. 험윤은 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가루가 가라앉기를 헛되이 기다린다. 하지만 검은 진흙처럼 끈끈하고 고운 커피 입자는 완전히 가라앉는 법이 없다. 충분히 무겁지 않은 미세한 입자들 일부는 잔 전체를 부유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다시 한 모금 커피를 마신 그는 문득 생각난 듯이 줄어든 만큼의 뜨거운 물을 더 붓는다. 험윤은 느리게, 아주 느리게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을 즐긴다. 처음에는 아주 진한 농도에서 시작하여 점차 연해지는 농도의 순서로. 처음에는 따뜻한 커피로 시작해서 점차 불균일하게 식어 가는 온도의 순서로. 식은 커피는 그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슬리는 것은 오직 기계를 급속하게 통과하느라 금속과 고무 패킹, 녹 찌꺼기의 맛이 진하게 달라붙어 있는 커피이다. 기계를 통과한 커피는 전기적 열의 잔흔이 강하다. 마치 전기 주전자의 히팅코일에 의해 데워진 물과 같은 그런 전류의 맛이다. 간혹 카페에 가면 그는 오직 에스프레소만 마신다. 그는 에스프레소를 즐긴다. 진한 향기가 기계의 맛을 상당부분 상쇄시켜 주는 유일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카페에서 더블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두 잔의 에스프레소를 한꺼번에 주문한다. 서로 다른 온도와 거품과 감촉을 가지는 커피를 순차적으로 맛보기 위해서이다. 마치 집에 있는 것처럼. 식은 커피는 그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산비둘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화창한 날이라면, 그는 잔을 창가 탁자 위에 놓아둔다. 커피가 아침 햇살을 받을 수 있도록. 커피가 산비둘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식은 커피는 그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혀와 목구멍에 느껴지는 고운 입자의 감촉은 그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다시 뜨거운 물을 잔에 더 붓고, 커피 가루를 한 스푼 더 넣는다. 잔을 살짝 흔들면서 가루가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이런 과정을 몇 번 더 반복한다. 마침내는 한 모금을 채 마시기도 전에 커피가 금세 없어지면서 바닥이 드러난다. 여러 번 첨가한 커피 가루가 잔에 두텁게 침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쉽게 한숨을 쉰다. 그는 바닥이 드러난 잔 속의 커피 가루 퇴적물을 응시한다. 더할 수 없이 부드럽고, 파도 모양으로 소용돌이무늬가 들어가 있으며, 비릿하게 미지근한 냄새가 나고, 짙은 갈색이 짧은 그림자를 드리운 검붉은 회색, 머나먼 성운처럼 어둡고 눈부시게 반짝이는 미세한 은빛 입자들이 섞여 있는, 하루를 비교할 수 없이 의미심장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그것을.(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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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윤이 가장 사랑하는 일은 미지근한 물속에 잠긴 채 책을 읽는 것이다. 그가 욕조에 잠기는 정확한 이유는 몸을 씻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속에서 책을 읽기 위해서이다.(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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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면 그는 책장에서 새로운 책들을 무작위로 한 다스쯤 꺼내서 욕실 선반장과 소파, 주방, 책상 그리고 침대 등등에 이미 놓여 있던 책들 일부와 교체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의 세계는 무작위로 쇄신된다. 그의 삶이 임의의 페이지에서 다시 시작된다. 그의 독서는 이렇듯 종종 무작위의 우연을 즐기는 방식이므로, 그는 자신이 결코 흥미를 느낄 수 없다고 분명하게 결정 내린 책들은 집 안에 두지 않는다. 가능하면 언제 어디서나 제목을 특별히 확인하지 않은 채 손만 뻗어서 집어 들어도 만족스러운 독서가 보장되는, 그런 책들만으로 집 안의 책장을 채우려 한다.(17~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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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거울 속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면도를 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난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날 그는 마치 난데없이 벌레로 변신해 버린 자신을 발견한 외판원처럼, 그렇게 거울 속의 사내를 물끄러미 응시할 것이다. 절반쯤 대머리가 되어 버린, 절반쯤의 노인이 거울 속에 있을 것이다. 그때 험윤은 지하철에서 부딪힌 낯선 사람으로부터 물러나듯이, 그렇게 거울 속 낯선 사내로부터 한 발짝 물러난 채, 여전히 무표정하게, 이 세상의 모든 변신과 낯섦이 사실은 문학이 주장하는 만큼 충격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생애 처음으로 피부 깊숙이 실감하면서, 무표정하게 면도를 마칠 것이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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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나는 마침내 영국식 뒷마당으로 가는 길을 찾아낸 거야.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정체모를 어떤 매혹이 나를 사로잡아 버린 것이 분명했다. 나는 경희의 곁에 주저앉았고, 홀린 듯이 그녀의 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그녀가 책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마침내는, 믿을 수 없게도 그녀와 긴 대화까지 나누게 되었다. 그녀의 어눌한 듯한 발음과 고집스럽게 회피하는 눈길, 그리고 참으로 기묘하게도 매번 내 생각에……라고 시작되는 말투는 호기심에 사로잡힌 나를 크게 방해하지 않았다. 그날 경희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내 안에 아로새겨졌다. 내 안의 깜깜한 고대동굴에 최초의 누군가 횃불을 들고 들어왔고, 그을음과 재, 동물의 기름과 붉은 흙으로 죽지 않는 화려한 벽화를 남겼다. 나는 그것을 굳이 기억해 낼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그냥 그 자체로 내 안에 있었다. 그것은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살았다. 그것은 나였다. 그것은 내 피부이자 감각이었다.(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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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한 사람이 내게로 몸을 돌리고,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매혹적인 이야기를 좀 들려줘요, 하고 말했을 때, 일생 동안 오직 고요히 침묵만 하고 있던 수백 수천의 작은 종들이 비로소 내 안에서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의 은빛 투명한 나방들이 날갯짓을 시작했다. 은은한 울림이 밀려가고 밀려왔다. 격한 파도가 되어 부풀었다가 부드러운 거품처럼 아래로 꺼지기를 반복했다. 한 사람이 내게 말했다. 나에게 매혹적인 이야기를 좀 들려줘요. 내 안에서 영국식 뒷마당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며 오랜 물 위로 떠올랐다.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영국식 뒷마당으로 들어갔다.(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