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오스카 와일드, 《심연으로부터》, 문학동네, 2015.

시월의숲 2016. 10. 23. 22:54

당신한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고통은 우리를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야. 고통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살아 있음을 의식하게 해주기 때문이지. 과거의 고통에 대한 기억은 우리에게 꼭 필요해. 그건 우리의 지속적인 정체성에 대한 보증서이자 증거 같은 것이거든. 나 자신과 즐거움의 기억 사이에는 나 자신과 실제의 즐거움 사이만큼이나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어. 세상 사람들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당신과의 삶이 쾌락과 허랑방탕함과 웃음만으로 일관된 것이었다면, 아마 난 과거의 단 한순간도 기억해낼 수 없었을 거야.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이 비극적이고 씁쓸하며 불길한 전조와, 단조로운 장면들과 볼썽사나운 과격함 속에서 무미건조함과 두려움이 느껴지는 순간들과 날들로 점철된 것이었기 때문에 난 그 각각의 사건들을 아주 세세한 것까지 보고 들을 수 있는 거야. 사실,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해. 이곳에서는 일상적인 고통에 둘러싸여 살아가다보니,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되는 당신과의 우정이 내가 여기서 매일같이 겪어내야 하는 다양한 고통의 방식들을 위한 전주곡 같다는 생각이 늘 나를 따라다녀.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고통은 우리의 우정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는 생각마저 들어. 마치 그동안의 내 삶이―나 자신과 남들에게 어떻게 보였든―예술에서 모든 위대한 주제를 다루는 방식을 특징짓는 불가피성과 함께, 리드미컬하게 연결된 악장들을 지나 분명한 결말에 이르는 진정한 슬픔의 교향악이었던 것처럼.(69~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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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은 참 이상해. 우리를 벌줄 때 우리의 악덕을 그 도구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우리 안의 선하고 다정하고 인간적이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이용해 우리를 파멸로 이끄니 말이야. 나 역시 당신과 당신과 당신 가족에 대해 연민과 애정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끔찍한 곳에서 눈물 흘리고 있진 않았을 거야.(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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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는 우리를 눈멀게 하지. 당신은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사랑은 아주 멀리 떨어진 별에 쓰인 것도 읽을 수 있게 하지만, 증오는 당신을 철저히 눈멀게 해 담장으로 둘러싸인 옹색한 정원, 방탕함으로 꽃이 시들어버린 저속한 욕망의 정원 너머는 볼 수 없게 만들지. 당신의 끔찍한 상상력 부족―당신 성격 중 실제로 치명적인 단 하나의 결점―은 전적으로 당신 안에서 살았던 증오의 결과물이야. 증오는 이끼가 갯버들의 뿌리를 조금씩 갉아먹듯 교묘하고 조용하고 은밀하게 당신 본성을 갉아먹었지. 그 결과 당신 머릿속은 시답잖은 흥밋거리들과 하찮은 목표들로 가득차게 된거야. 사랑이 당신 안에서 키워줄 수 있었을 능력을 증오가 독살하고 마비시켰던 거지.(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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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은 재작년 11월 초에 일어난 일이었지. 그토록 아득한 시간과 당신 사이에는 거대한 삶의 강물이 가로놓여 있지. 당신이 그토록 광대한 황량함 너머를 본다는 것은 아마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 거야. 하지만 내겐, 이 모든 일이 어제도 아닌, 바로 오늘 일어난 것만 같이 느껴져. 고통은 하나의 긴 순간이기 때문이지. 고통은 계절처럼 나눌 수 있는게 아니야. 우린 다만 그 다양한 순간들을 기록하고, 그 순간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라고. 우리에게 시간은 전진하는게 아니야. 순환할 뿐이지. 이곳에서의 시간은 고통을 중심축으로 끊임없이 회전하는 것처럼 느껴져. 삶을 마비시키는 부동성. 일상의 세세한 상황까지 불변의 패턴에 따라 규제하기. 먹고 마시고 걷고 눕고 기도하거나 또는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행위까지 빠짐없이 지배하는, 철의 공식으로 이루어진 가차없는 법칙. 이러한 삶의 부동성은 끔찍한 각각의 날들을 아주 작은 디테일에서까지 형제처럼 닮게 만들어버리면서,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외적인 힘들에까지 그 부동성을 전염시키는 것처럼 보이지. 파종기나 수확기, 허리를 굽혀 곡식을 수확하는 사람들이나 포도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면서 포도를 따는 사람들, 떨어진 꽃잎들로 새하얗게 변하거나 떨어진 과일들이 흩어져 있는 과수원의 풀밭에 관해서 우린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 수 없어. 우리에겐 오직 한가지 계절, 고통의 계절만이 존재하기 때문이지.(117~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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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도 내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다른 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주는 믿음을 난 만질 수 있고 바라볼 수 있는 것에 주지. 나의 신들은 손으로 만들어진 신전에 살고 있고, 실제 경험의 범주 안에서 나의 믿음은 완전하고 완벽해지지. 어쩌면 너무 완벽한지도 모르겠어. 이 땅에 자신들의 천국을 자리잡게 하는 다른 많은, 또는 모든 사람들처럼 난 그 속에서 천국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지옥의 공포까지도 발견했기 때문이야.(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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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과 웃음 뒤에는 거칠고 엄혹하고 냉담한 기질이 있을 수 있어. 하지만 고통 뒤에는 언제나 고통이 있을 뿐이지. 기쁨과는 달리 고통은 가면을 쓰지 않아. 예술에서 진실은 근본적인 아이디어와 우연적인 존재의 필연적인 일치가 아니야. 그것은 형태와 그림자 사이의 유사성도, 크리스털에 비친 형태와 형태 그 자체 사이의 유사성도 아니야. 공허한 언덕으로부터 들려오는 메아리도 아니고, 달을 달에게 보여주고 나르키소스를 나르키소스에게 보여주는 계곡의 은빛 샘물도 아니야. 예술에서 진실은 어떤 것이 자신과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지. 내면을 표현하는 외형. 인간의 모습을 한 영혼. 정신이 충만한 육체. 이런 이유로 고통에 비견할 수 있는 진실은 세상에 없어. 때로는 고통만이 유일한 진실인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지. 그 밖의 다른 것들은 어쩌면 우리를 눈멀게 하거나 물리게 하기 위한, 눈이나 욕구에서 비롯된 환상일수도 있지만, 세상은 고통으로부터 만들어졌고, 어린아이나 별의 탄생에도 고통이 함께하지.(153~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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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언젠가 나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나를 보러 와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자기는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하는 나쁜 말들을 한마디도 믿지 않으며, 나를 완전히 결백한 사람으로, 당신 아버지가 꾸민 비열한 흉계의 희생자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내가 알기를 바란다고 말이지. 나는 그의 말에 울음을 터뜨리면서 이렇게 말했어. 당신 아버지의 결정적인 비난 가운데는 거짓된 것들과 역겨운 적의에 의해 내게 전가된 것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내 삶이 비뚤어진 쾌락들과 기이한 열정들로 가득했던 것 또한 사실이라고. 그러니 그가 그 사실을 나에 관한 기지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이상 그의 친구가 될 수 없고, 그와 어울릴 수도 없다고 말했지. 그는 내 말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우린 여전히 친구로 남았어. 나는 가식으로 그의 우정을 구하지 않았던거야. 당신에게도 말했듯이, 진실을 말하는 것은 고통을 동반하는 법이야. 하지만 거짓을 말하도록 강요받는 것은 더욱더 고통스러운 일이지.(217~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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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상에도 사랑이 뚫고 들어가지 못할 감옥은 없어. 당신이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사랑에 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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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삶의 쾌락과 예술의 기쁨을 배우기 위해 나에게 왔지. 어쩌면 난 당신에게 그보다 훨씬 더 멋진 것을, 고통의 의미와 그 아름다움을 가르쳐주기 위해 선택된 사람인지도 몰라.(2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