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다른 삶, 다른 인간

시월의숲 2017. 5. 7. 14:19

나는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여러 유형의 다른 인간이 되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다. 알지 못하는 나라의 깃발 아래서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죽기를 바랐다. 단지 오늘이 아니라는 이유로 훨씬 더 나아 보이는 어떤 다른 시대에, 제국의 황제로 선포되고 싶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화려한 시대, 한번도 보지 못한 진지한 스핑크스의 시대에. 나 자신인 자를 우스꽝스럽게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원했을 것이다. 나 자신인 자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원했을 것이다.(743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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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자조적이고 시니컬한 바람. 나 자신인 자를 우스꽝스럽게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했을 것이라는 말. 앞의 두 문장을 읽고 무척 공감을 했으나 뒤이어 나오는 문장들을 읽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국의 황제로 선포되고 싶다는 것이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일이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위하여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는 심리는 도대체 무엇일까. 자기모순적이고 자학적이며 분열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어떤 감정. 하지만 한발짝 뒤에서 보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또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여러 유형의 다른 인간이 되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알지 못하는 나라의 깃발 아래서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죽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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