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여행에 대하여

시월의숲 2017. 5. 22. 23:42

여행? 존재 자체가 이미 여행이다. 나는 매일같이 내 몸이라는 운명의 기차를 타고 이 역에서 저 역으로 향한다. 혹은 거리와 광장에서 사람들의 얼굴에서 얼굴로 여행한다. 마치 차창 밖의 풍경처럼 항상 똑같으면서 항상 다르기도 한 그것들을 바라본다.

내가 상상하는 것을, 나는 눈앞에서 본다. 여행을 떠나면 그것과 무슨 차이가 생긴단 말인가? 상상력이 끔찍하게 빈곤한 경우에나 실제로 뭔가를 느끼기 위해 장소의 이동이 필요한 법이다.(747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

페소아가 지금의 우리들을 보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우리들이 그렇게도 여행에 집착하는 이유가 어쩌면 끔찍하게 빈곤한 상상력 때문이란 말일까? 그에 따른 다양한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존재 자체가 이미 여행'이라는 페소아의 말이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내 몸은 이미 운명이라는 기차를 타고 이 역에서 저 역으로 흘러가고 있다. 차창 밖의 풍경처럼 항상 똑같으면서도 항상 다르기도 한 그것들을, 우리는 매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아는만큼 망각 또한 잘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행을 떠나고, 돌아오며, 또 떠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 망각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존재 자체가 이미 여행'이라는 페소아의 말처럼, '존재 자체가 이미 망각'인데! 우리는 잊혀졌거나, 잊혀지는 중이거나, 잊혀질 예정이다. 우리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불안의서(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것이 생전 처음인 듯  (0) 2017.06.25
여행자  (0) 2017.06.03
다른 삶, 다른 인간  (0) 2017.05.07
미묘하고 흐릿한 고통  (0) 2017.04.15
이 가망없는 페이지들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  (0) 2017.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