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이 가망없는 페이지들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

시월의숲 2017. 3. 26. 16:55

내가 쓴 모든 글은 전부 다 잿빛이다. 사람들은 말하리라. 내 인생, 심지어 내 정신적인 삶까지도 온통 우중충하고 어둑어둑며, 그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오직 비만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고. 내 삶은 전부가 무의미한 특권, 잊힌 목적 같기만 했다고. 누더기가 된 비단옷을 걸친 나는 고뇌한다. 빛 속에서도 권태 속에서도 나는 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물들 사이 일련의 복잡한 간극 속에서 아직 남아 있는 한 줌의 의식에게 질문한다. 무엇을 위해 나는 이 수많은 페이지들을 내가 내 것이라고 생각한 문장들로, 내가 생각이라고 여긴 느낌들로 가득 채우고 군대의 깃발과 휘장으로 펄럭이게 만들었는가. 결국은 뒷골목 거지의 어린 딸이 침으로 붙여놓은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게 될 것들을.

파괴된 나의 잔해에게 묻는다. 폐기되고 산산이 흩어질 미래를 앞에 둔, 누군가 갈기갈기 찢어버리기도 전에 이미 어딘가로 실종되어버릴 운명인 이 가망없는 페이지들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

나는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나는 질문을 기록하고, 질문에 새로운 문장을 입히며, 새로운 감성을 벗겨낸다. 내일 나는 내 한심스런 책을 계속해서 쓰게 될 것이다. 확신도 없는 내 일상의 느낌을 차가운 펜으로 종이에 옮길 것이다.(731~732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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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망없는 페이지들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 나 또한 궁금하다. 나 역시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듯이. 이 무미건조하고 무의미한 생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내가 쓴 모든 글이 전부 잿빛이며, 온통 우중충하고 어둑어둑하며, 그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오직 비만 추적추적 내리고 있더라도. 내가 페소아의 글을 놓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한다. 내가 페소아에게 끌리는 이유를 생각한다. 나는 그의 글에서 나 자신을 본다. 페소아가 느낀 어떤 심정이 내 심정과 교묘히 겹쳐지는 것을 느낀다. 마치 하나의 음이 다른 음과 겹쳐져 새로운 음이 탄생하는 것처럼, 그렇게 신비하면서도 고독한 느낌이 나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이럴 때의 고독은 결코 진부한 고독의 빛깔을 띠지 않는다. 그가 질문하고 또 질문하듯이, 나 또한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고독을 고독이 아닌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한심스럽지만, 한심스러운대로, 확신도 없는 내 일상의 느낌을 차가운 펜으로 나 또한 쓸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