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당신의 대답

시월의숲 2017. 10. 19. 22:58

감기는 점차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완전하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아직 목소리가 완벽하게 돌아오지 않았고, 콧물과 코막힘이 여전히 남이 있습니다. 감기가 잘 낫지 않는 이유는 아무래도 일교차가 심한 날씨 탓이겠지만, 어쩌면 피로가 누적된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 야근에다 토요일까지 일하러 나가는 형국이니 감기가 잘 낫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오늘도 아침부터 회의를 하고 출장을 다녀오고 해서 정작 앉아서 조용히 처리해야 할 일들을 제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상사는 그 지역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인사로, 말이 지나칠 정도로 많고, 당연하게도 회의를 좋아하고(본인의 이야기를 늘어놓는게 태반이지만), 요구사항이 많으며, 다그치기를 잘합니다. 그런 상사 밑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회의를 한답시고 앉아 있으려면, 여간 인내심이 있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듭니다. 오늘 아침 회의에서는 글쎄 깜빡 졸뻔 했다니까요. 감기 때문에 컨디션도 좋지 않은데다 장기 야근으로 인한 피로가 누적된 탓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제가 급속도로 늙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합니다. 내 살이 깎이고 있는 느낌, 나를 이루고 있는 중요한 성분이 점차 사라지거나 옅어지고 있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입니다. 이건 감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로 인한 스트레스가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로 인해 여러가지 신경써야 할 일들이 모두 귀찮아지고 짜증스러워집니다. 심지어 지금 내가 뭘하고 있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 때도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내가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가. 나는 내 삶을 너무 내팽겨쳐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중요하지 않은 일에 온 힘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들. 이런 물음들이 지금의 내 머릿속에 가득차 있습니다. 급기야 오늘은 퇴근길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습니다. 평소 사십 분 정도 되는 거리의 퇴근길이 오늘은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쌀쌀한 날씨에 주위는 어둡고 비까지 추적추적 오고, 야근하느라 저녁도 못먹어서 그런지 나 자신이 왜그리 서글프게 느껴지던지요. 집에 가도 차가운 방바닥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울컥하기까지 했습니다. 오늘만큼은 내가 직접 차려먹는 밥이 아닌, 누군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늘 엄혹한 법. 나는 오늘도 라면을 끓여 삼각김밥과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먹던 음식들이 오늘은 유난히 서글프게 느껴지는 것은 내 몸과 마음이 여러가지 이유로 지쳤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이렇게 보내지 못할 편지, 수신인 없는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언젠가 나는 보내지 않음으로써 완벽해지는 편지를 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혼잣말이, 혼잣말이기 때문에 비로소 완벽해질 수 있다고,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 모를 말을 했지만, 오늘만큼은 내 이런 자위조차 아무 소용없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당신이 내게 말해줄 수 있나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만 하나요? 당신의 대답이 - 그게 어떤 내용이든 -  무척이나 듣고 싶은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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