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흔하지만 흔하지만은 않은

시월의숲 2017. 10. 30.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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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늦은 산책이었다.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책을 들고 집을 나섰다. 늦은 산책이었기에(또 바람도 불고 기온도 내려가 좀 추웠기에) 책을 읽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책을 들고 산책을 하고 싶었다. 이창래라는 한국계 미국작가가 쓴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소설이었다. 나는 늘 가던 길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바람이 많이 불었지만 일단 집을 나왔으니 산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냇가의 돌다리를 건너고 야트막한 산 아래 설치된 데크를 걷고 또 돌다리를 건너서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왔다. 날씨 탓인지 산책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가져간 책은 결국 읽지 못했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길에 석양을 만났다. 석양을 본 것이 아니라 석양과 만났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석양이 마치 나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흔한 풍경이 아니냐고 말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석양은 매일 볼 수 있으니까. 흔한 석양이지만, 나는 얼마나 자주 저녁하늘을 바라보는가, 얼마나 자주 저런 풍경과 만나는가, 생각하니 흔하던 그 풍경이 새롭게만 보였다. 더구나 그것은 어제의 석양도 그저께의 석양도 아닌 바로 오늘의 석양인 것이다! 밤하늘의 별을 잊고 산 지 오래듯이, 저 석양도 그러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저것은 흔하지만 결코 흔하지만은 않은 풍경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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