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동생이 태어났기 때문에 얼이가 죽은 건가요?"
"무슨 소리냐?"
"내가 물었어요. 사람은 왜 죽는 거냐고. 그러니까 누나가 대답해줬어요, 한 명의 아기가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는 거라고."
"그 말은 맞을 수도 있지만, 반드시 여동생 때문에 그 사내아이가 죽은 건 아니란다. 대개의 경우는 노인들이 먼저 죽으니까. 게다가 세상에는 사람만이 생명은 아니지. 고양이도 죽고 쥐도 죽는다. 그러니 누구 때문에 누가 죽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없어."
"난 여동생은 없어도 되는데……"
"그런 바보 같은 말 하는 거 아니야."
아버지는 화난 얼굴을 하고 방에서 나갔다. 아버지의 등뒤로 문이 닫히자 마루의 빛이 사라지면서 방안은 어두워졌다. 밤은 다른 밤보다 더욱 어두웠다. 내가 아는 밤 중에서 가장 어두운 밤이었다. 나는 잠이 들었다.(71쪽, '얼이에 대해서')
*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94쪽, '1979')
*
그날 오후, 교사에게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쓸쓸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분주하고 항상 시간에 쫓기면서도, 살짝 먼지가 덮힌 허깨비처럼 쓸쓸한 일상.(104쪽,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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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전화했을 때 동생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좀 지쳤어요. 쉬고 싶어요. 고향으로 내려갈까 해요."
그래서 교사는 대꾸해주었다.
"고향이라니, 넌 서울에서 태어났잖아."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이 고향이에요."
동생은 이렇게 말했다.(112쪽,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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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처럼 자유로울 권리의 선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은 죽음의 전언만이 유일한 때가 곧 오리라는 사실을 아직은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교사는 비장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115쪽,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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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일어났다고 알려진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보다 신비롭다. 그것은 동시에 두 세계를 살기 때문이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비순차적인 시간을 몽상하는 어떤 자의식이 있고, 우리는 그것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191쪽, '뱀과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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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그것은 막 덤벼들기 직전의 야수와 같았다고 여교사는 생각했다. 모든 비명이 터지기 직전, 입들은 가장 적막했다. 시간과 공기는 맑은 술처럼 여교사의 갈비뻐 사이에 고여 있었다. 염세적인 사람은 일생에 걸친 일기를 쓴다.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223쪽, '뱀과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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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이야기로군요."
내가 말했다.
"말이란 신비하니까요."(261쪽,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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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아는 곳 그 어디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파국을 향한 열망을 느꼈다. 나는 떨어지고 싶었다. 빌딩이나 계단이나 지붕이나 플랫폼 위에서. 생애 처음으로, 너무도 강렬하게, 추락의 열망을 느꼈다. 순식간에, 플랫폼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모든 파국적인 것에 대한 열망을 느꼈다. 나는 선로의 침목 사이에 들어가 눕고 싶은 열망을 느꼈다. 선로 위로 쏟아지는 햇살은 팔월처럼 번득였다. 기차가 내 얼굴 위로 지나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싶은 열망을 느꼈다. 오직 그런 순간을 경험하고 싶었다. 둘도 없는 그 무엇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죽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히 알았다. 아무런 희망 없는 상태로, 할머니조차없이, 이제 막 초경이 시작된 소녀는 임신한 여인과 마찬가지로 붉고 축축한 죽음과 가장 가까워졌기 때문이다.(262쪽,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
달이 빛나는 맑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검은 자동차가 비에 젖은 듯 번득이며 지나갔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내가 모르는 팔월처럼 번득였다. 내가 모르는 언어로 적힌 편지는 파국을 향해 붉게 산란됐지만, 그 소리의 여운은 여전히 내 혀끝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것은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소녀에 관한, 길고, 늙고, 팔월처럼 번득이는, 한없이 섬뜩하고 한없이 음란한 편지였다. 나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채로, 홀로 몸서리쳤다.(267쪽,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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