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로베르트 발저, 《산책자》, 한겨레출판, 2017.

시월의숲 2017. 7. 12. 22:55

아침의 꿈과 저녁의 꿈, 빛과 밤, , 태양 그리고 별. 낮의 장밋빛 광선과 밤의 희미한 빛. 시와 분. 한 주와 한 해 전체. 얼마나 자주 나는 내 영혼의 은밀한 벗인 달을 올려다보았던가. 별들은 내 다정한 동료들. 창백하고 차가운 안개의 세상으로 황금의 태양빛이 비쳐들 때 나는 얼마나 크나큰 기쁨에 몸을 떨었던가. 자연은 나의 정원이며 내 열정, 내 사랑이었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나에게 속하게 되니, 숲과 들판, 나무와 길들. 하늘을 올려다볼 때 나는 왕자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저녁이었다. 나에게 저녁은 동화였고, 천상의 암흑을 소유한 밤은 달콤하면서도 불투명한 비밀에 감싸인 마법의 성이었다. 종종 어느 가난한 남자가 뜯는 하프의 현이 영혼을 울리는 소리가 되어 밤을 관통하곤 했다. 나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또 귀 기울였다. 모든 것이 좋았고, 옳고, 아름다웠다. 세계는 온통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장엄하고 유쾌했다. 그러나 음악 없이도 나는 유쾌했다. 나는 시간에 현혹당하는 듯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듯이 시간에 말을 걸었고, 시간도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생각했다. 시간에 얼굴이 있는 듯 한참을 쳐다보았고, 시간 또한 묘하게 다정한 눈동자로 나를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떨 때 나는 마치 물에 빠져 죽은 사람과도 같았다. 그만큼 고요하고, 소리 없고, 말없이 나는 그냥 살았다. 주변의 모든 사물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누구도 생각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을 나는 하루 종일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나 감미로운 생각이었는지. 아주 드물게 슬픔이 나를 방문했다. 때때로 보이지 않는 무모한 무용수처럼 구석진 내 방으로 불쑥 뛰어드는 바람에 웃음이 터진 적도 있었다. 나는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았고,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나는 참으로 멋지게 그리고 보기 좋게 옆으로 비껴나 있었다.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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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수한 인간들 중 하나이며, 바로 그 점을 나 스스로 기이하게 여긴다. 나는 무수한 인간들 자체를 기이하게 여겨서 항상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저 많은 사람들이 무얼 하느라 저리 바쁜 것일까?’ 나는 무수한 군중 속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진다.(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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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 자신으로 있지 못하고 내가 아닌 것이 되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것이야말로 멍청한 행동일 겁니다. 내가 나일 때, 나는 나에게 만족합니다. 그러면 나를 둘러싼 세상 전체도 조화로운 음색을 냅니다.(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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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그는 불행하지 않다. 쓸쓸할 수 있는 자야말로 행복하다고, 그는 남몰래 생각한다. 당연하고도 힘차게, 쓸쓸한 자는. 그에게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미세한 뉘앙스가 있어서 주변을 그늘지게 만들어버린다. 그는 지나치게 민감하고 조심스럽게 불신이 가득하며 결단력이 없어서 끝내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는 비명을 지르고 울고 싶다. 하늘에 계신 신이여, 도대체 나는 왜 이런 건가요, 그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언덕길을 빠르게 달려 내려간다. 밤은 그를 기분 좋게 만든다. 방에 도착하여 책상에 앉은 그는 광폭한 기세로 일하려고 마음먹는다. 램프의 불빛은 그가 머무는 지역의 이미지를 거두어가고 그의 머리를 맑게 만든다. 이제 그는 글을 쓴다.(19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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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아 있지 않다. 그는 외친다. 눈을, 손을, 다리를, 그리고 호흡을 어디로 향해야 할지 그는 알지 못한다. . 아무것도 없는. 나는 꿈을 원하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중얼거린다. 나는 너무도 고독하게 살고 있구나. 자신이 이 세상을 얼마나 무감각한 태도로 살아가는지를 느끼자,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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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안정을 몰랐다. 사방 모든 곳을 불안하게 쏘다녔다. 포근한 침대에서 잠드는 적이 없었고, 편안하고 아늑한 그 어떤 집에서도 살 수 없었다. 그는 어디서나 살았고, 그 어디에서도 살지 않았다. 그는 고향이 없었고, 어디에도 거주권이 없었다. 조국도 없고 행복도 없는, 이것이 바로 그였다. 단 한줌의 사랑이나 인간적인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채 그는 살아야 했다. 그는 아무것과도 관련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그나 그의 표류하는 삶과 관련된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그에게 과거, 현재, 미래는 전부 실체 없는 사막이었고, 삶은 너무 하찮았으며, 너무나 빈약하고, 너무나 협소했다. 그는 세상의 어떤 것에도 의미를 찾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그에게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310~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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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에 풍요로운 대지가 펼쳐져 있었지만 나는 가장 작고 가장 허름한 것만을 주시했다. 지극한 사랑의 몸짓으로 하늘이 위로 솟아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나는 하나의 내면이 되었으며, 그렇게 내면을 산책했다. 모든 외부는 꿈이 되었고 지금까지 내가 이해했던 것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표면에서 떨어져 나와 지금 이 순간 내가 선함으로 인식하는 환상의 심연으로 추락했다. 우리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라 어떤 다른 존재였으며, 또한 바로 그렇게 때문에 비로소 진정으로 나 자신이었다.(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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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 눕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끼고 주변을 보니 마침 다행스럽게도 가까운 곳에 편해 보이는 호숫가 공터가 있어서 나는 몸도 지친 참에 정성스럽게 드리운 나뭇가지들 아래 부드러운 땅바닥에 편안히 누웠다. 그렇게 흙과 대기와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구슬프고도 불가피하게,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갇힌 가련한 죄수로구나, 이런 식으로 모든 인간은 결국 다들 마찬가지로 가련하게 갇힌 존재일 수밖에 없구나, 우리 모두의 앞에 놓인 것은 오직 한 가지 길, 흙 속의 구멍으로 들어가서 눕는 길뿐,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반드시 무덤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달리 방법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모든 것, 모든 것이, 이 충만한 모든 삶이, 다정하고 사려 깊은 색채들이, 모든 매혹이, 삶의 활기와 기쁨이, 인간의 모든 의미가, 가족, 친구, 사랑하는 사람, 신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가득 찬 이 환하고 싱그러운 대기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들이, 그리고 사랑하는 이 은은한 거리들, 드높이 뜬 태양과 달이 어느 날 사라져버리고 인간의 심장과 눈동자는 죽어야만 하는구나.' 나는 오랫동안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고 아마도 내가 상처와 고통을 주었을 법한 사람들에게 가만히 용서를 빌었다.(375~3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