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어디로 가려는 걸까. 내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니, 그보다 나는 대체 어디로 와버렸을까? 여긴 대체 어디일까? 아니, 그보다 근본적으로, 나는 대체 누구인가?(1편,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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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믿을 수 없이 갑작스러운 우연과 예측 불가능한 굴곡진 전개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진행되는 동안에는 대부분 아무리 주의깊게 둘러보아도 불가해한 요소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쉽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난다.(1부, 94~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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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하되 그 자명성을 언어화하기는 어렵다.(1부, 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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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존재를 믿으세요?"
"당신은 믿습니까?"
나는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멘시키가 말했다. "저는 영혼이 실재함을 굳이 믿을 필요 없다는 설을 믿습니다. 하지만 거꾸로 말해 그것은 영혼이 실재함을 믿지 않을 필요도 없다는 설을 믿는 셈이지요. 좀 에두른 표현이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시겠습니까?"
"막연하게는요." 내가 말했다.(1부, 282~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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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고 어두운 공간에 혼자 갇혀 있을 때 가장 무서운 건 죽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영원히 여기서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공포로 숨이 막히는 느낌이지요. 주위의 벽이 점점 좁혀들어 이대로 으스러질 것 같다는 착각에 사로잡힙니다.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그 공포를 넘어서야 합니다. 스스로를 극복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에 무한히 근접할 필요가 있습니다."(1부, 4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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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순간 동결된 불꽃'이라는 표현을 붙이고 싶은 신비로운 광채가 있었다. 열기를 품은 동시에 철저히 냉정한 광채. 내부에 자체 광원을 지닌 특수한 보석 같다고 할까. 바깥을 향하는 순수한 요구의 힘과 완결을 향하는 내향적인 힘이 그 안에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2부,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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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네요." 마리에가 말했다.
"그런 날도 있어." 내가 말했다. "시간이 빼앗아가는 게 있는가 하면 시간이 가져다주는 것도 있어. 중요한 건 시간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일이야."(2부, 2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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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은 언젠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멘시키가 말했다. "시련은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예요. 가혹하면 가혹할수록 훗날 쓸모가 있습니다."
"시련에 져서 좌절하지 않는다면 말이죠."(2부,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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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면서 짧은 꿈을 꾸었다. 무척 명백하고 선명한 꿈이었다. 그러나 어떤 꿈이었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나는 것은 그것이 무척 명백하고 선명한 꿈이었다는 사실뿐이다. 꿈이라기보다 무슨 착오로 잠 속에 섞여든 현실의 자투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잠이 깼을 때 그것은 날쌘 짐승처럼 흔적도 없이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2부, 178~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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