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컬처그라퍼, 2018.

시월의숲 2019. 1. 3. 00:16

여행에서 두 번 다시란 없으니까. 다시 왔을 때 나는 그때의 그 사람이 아닐 테니까.(31쪽)



*



젊었을 때 많이 여행하라는 흔한 말을 뒤집으면, 여행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젊은이라는 말이 된다. 나이가 젊다면 당연히 육체적으로야 여행하기에 수월하겠지만, 여행은 체력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지갑을 구경시켜주다가 여행 경비를 털리거나, 책만 믿고 깊은 밤 문을 닫은 호텔까지 걸어서 찾아가는 등 우리가 여행지에서 하는 멍청한 일의 리스트는 끝이 없다. 그런 일 앞에선 몇 년 동안 헬스클럽을 다니며 단련한 20대의 몸이라고 해도 속수무책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오직 정신력뿐이다. 낯선 지방을 방문하는 여행자는 구급약과 함께 이 정신력을 꼭 챙겨야 한다. 그것에 기대어 너무나 서툴러서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버젓이 저지르는 자신을 견뎌야 한다.

여행자란 바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건 젊은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여행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젊은이가 되는데, 이 젊은이란 사실 실제적인 나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낯선 도시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행자 또는 젊은이'가 될 수 밖에 없으니까.(39쪽)



*



멀리서 바라볼 때 라스베이거스가 신기루처럼 우리를 유혹하는 까닭은, 결국 대개는 패배할 운명이라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소망하고 다시 꿈꾸는 일이 바로 인간의 일이기 때문이리라.(48쪽)



*



대개의 경우 내게 독서는 12시간 동안의 비행과 같은 지루한 시간을 이겨내는 좋은 취미 생활이지만, 때로는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자유는 남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더 많은 사람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나는 더욱더 자유로워진다. 그런 점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래서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책이 있는 게 아닐까? 원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다.(75쪽)



*



조직은 인간을 난쟁이로 만든다는 것, 고독은 우리의 성장판이라는 것,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해야 할 일을 할 때 인간은 자기보다 더 큰 존재가 된다는 것.(141쪽)



*



소설에는 욕망을 지닌 주인공이 등장한다. 욕망하는 목표가 생기는 순간부터 그는 헤매게 돼 있다. 이 '헤맨다'는 말을 그럴듯하게 표현하면 여행이 된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는 일상의 시공안을 벗어나 새로운 시공간을 찾아가는 여행담이라고 할 수 있다.(174쪽)



*



알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말은 모르면 늘 똑같이 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은 날마다 달라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결 같은 것처럼 보인다면, 내가 모르는 게 있다는 뜻이다.(179쪽)



*



바로 그 순간이 '여기는 어디이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때다. 대개 여행의 목적은 그런 의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데 있으니까, 비로소 나는 목적지에 다다른 셈이다.(193쪽)



*



내게 세상의 모든 관광지는 휴일의 놀이공원과 같다. 나는 휴일의 놀이공원을 대단히 싫어한다. 거기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과 그보다 더 많은 무리의 사람들과, 그리고 그들 모두를 거대한 열린 지갑으로 보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란, 두 가지 유형의 사람만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지갑을 가진 사람과 거스름돈을 가진 사람.(217쪽)



*



여행자가 된다는 것은 갓 태어난 아이처럼 세계를 바라본다는 의미다. 훌륭한 여행자는 여행이 끝난 다음에도 계속 여행자로 남는 사람이다.(231쪽)



*



기억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포토샵이 사진의 노출을 보정하듯 기억은 과거에 관한 판단을 보정한다. 좋았던 시절은 더 또렷하게, 나빴던 시절은 더 흐릿하게 혹은 그 반대로. 그제야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았으냐가 아니라 어떻게 삶을 바라보느냐, 더 나아가서 어떻게 말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점에서 누구에게나 삶은 잘 짜인 픽션이다. 삶은 여행에 곧잘 비유되니, 그렇다면 여행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이야기로 들려주는 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235~236쪽)



*



기다릴 수 있는 한에는 그 사람이 온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 희망이 사라지는 건 기다림이 끝날 때다.(252쪽)



*



낯선 풍경 앞에 서 있을 때 나는 여행자가 된다. 히말라야나 남극이나 아마존에 간다면, 나는 이전에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어떤 존재가 될 게 분명하다. 그럼 반대의 경우라면 어떨까? 어떻게 하면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떠나 나를 둘러싼 풍경을 바꾸면 된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본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새롭고, 또 신기하게.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때 나도 바뀐다. 그러므로 여행이 다 끝났을 때, 비로소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255~2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