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페터 한트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2009.

시월의숲 2020. 3. 22. 20:31

블로흐는 문가에서 팔에 수건 한 묶음을 얹고 그 위로 회중전등을 든 아가씨를 보았다. 그가 아는 체를 하기도 전에 그녀는 복도로 나가 버렸다. 그녀는 문에 대고 잠을 깨워 미안하다고 했지만, 블로흐도 동시에 그녀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 복도로 나갔지만, 그녀는 다른 방에 들어가고 없었다. 블로흐는 자기 방으로 다시 돌아와 열쇠를 분명히 두 번 돌려서 문을 잠갔다. 나중에 그는 방 몇 개를 지나 아가씨를 뒤쫓아 가서 자기가 아까 착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수건을 세면대 위에 놓고 있던 아가씨가 "네, 저도 착각했어요."하고 대답했는데, 그녀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복도 끝 계단에 서 있는 버스 운전사를 그와 혼동하고, 그가 이미 방에서 나갔다고 생각해서 그의 방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열린 문 앞에 서서 듣고 있던 블로흐는 자기가 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 수돗물을 틀어 놓고 있었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해서 무슨 말을 했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 말에 블로흐는 방에 너무 많은 장과 함께 서랍장들이 있다고 했다. 아가씨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이어서 여관에 종업원이 너무 적다며 아까 자기가 착각했던 것도 피곤해서 생긴 일이라고 했다. 블로흐는 장 이야기를 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고 방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는 뜻이라고 대답했다. 아가씨는 그것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블로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방에 어질러진 수건들을 주워 모으면서 그의 침묵을 해석하려 했고, 블로흐는 그녀가 어질러진 수건들을 주워 모으는 것을 자신의 침묵에 대한 대응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수건을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블로흐는 그녀가 커튼을 열려는 줄 알고 대답하지 않고 재빨리 어두운 복도로 나왔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하고 그녀는 말했다.(4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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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블로흐는 자신이 무엇인가 진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농담을 해도 여주인은 그가 말한 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그녀의 블라우스에 축구 운동복처럼 줄무늬가 있다고 말한 뒤 이야기를 계속하려고 했는데, 그녀는 비난하는 걸 보니 블라우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건 단지 농담이었다고 말해도, 또 블라우스가 그녀의 하얀 피부와 아주 잘 어울린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자기 피부가 너무 창백해서 그러냐고 또 물었다. 그는 부엌이 도시의 부엌과 거의 같게 꾸며져 있다고 농담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왜 '거의' 라는 말을 쓰느냐고 물었다. 심지어 블로흐가 소유주의 아들에 대해 농담을 했을 때도(그는 그녀에게 무슨 좋은 제안을 했다고 했다.), 그녀는 그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소유주의 아들은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말한 것은 아니라고 비유적으로 설명했지만, 그녀는 비유를 곧이곧대로 받아 들였다. "전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는데." 하고 블로흐가 말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한 이유가 이있을 것 아녜요." 하고 여주인은 대답했다. 블로흐는 웃었다. 여주인은 왜 놀리느냐고 물었다.(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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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판매업자에게 경기를 관람할 때, 공격하는 시점에서 처음부터 공격수는 쳐다보지 않고 그가 향하는 골문에 선 골키퍼를 주목해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공격수나 공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골키퍼만 바라보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죠." 하고 블로흐는 말했다. 공에서 시선을 돌리는 것은 정말 부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그는 사람들이 공 대신, 양손을 허벅지에 대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가 뒤로 뛰어들어 왔다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자기편 수비수들에게 고함을 지르는 골키퍼를 쳐다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골문을 향해 슈팅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골키퍼를 보게 되죠."

그들은 사이드라인을 따라 함께 걸어갔다. 블로흐는 선심이 그들 옆으로 뛰어가며 헐떡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골키퍼가 공도 없이, 그러나 공을 기다리면서 이리저리 뛰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요." 하고 블로흐가 말했다.

판매업자는 더 이상 골키퍼를 바라볼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은연중에 공격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골키퍼를 쳐다보려면 사팔눈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말하자면, 누군가가 문을 향해 가고 있을 때, 가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문 손잡이를 보는 격이기 때문이다. 골치가 아파서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습관이 되어 있지만, 그러나 우스운 일이지요." 하고 블로흐는 말했다. 

패널티킥이 선언되었다. 관중들은 골문 뒤로 달려갔다.

"골키퍼는 저쪽 선수가 어느 쪽으로 찰 것인지 숙고하지요." 하고 블로흐가 말했다. "그가 키커를 잘 안다면 어느 방향을 택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죠. 그러나 패널티킥을 차는 선수도 골키퍼의 생각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골키퍼는,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고공이 오리라고 다시 생각합니다. 그러나 키커도 골키퍼와 똑같이 생각을 해서 원래 방향대로 차야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겠죠? 이어 계속해서, 또 계속해서……."

블로흐는 모든 선수들이 차차 패널티에어리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패널티킥을 찰 선수는 슛 지점에 공을 갖다 놓았다. 그런 다음 그도 뒷걸음질로 패널티에어리어 밖으로 나갔다. 

"공을 차기 위해 키커가 달려 나오면, 골키퍼는 무의식적으로 슈팅도 되기 전에 이미 키커가 공을 찰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 키커는 침착하게 다른 방향으로 공을 차게 됩니다." 하고 블로흐가 말했다. "골키퍼에게는 한 줄기 지푸라기로 문을 막으려는 것과 똑같아요."

키커가 맹렬히 달려왔다. 환한 노란색 스웨터를 입은 골키퍼는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패널티 키커는 그의 두 손을 향해 공을 찼다.(119~1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