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는 나와 그, 그리고 제3의 목소리가 존재한다. 나와 그, 우리 두 사람은 객석에 등을 돌린 채 멀리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나란히 바닥에 요가의 연꽃자세로 앉아있다. 우리의 머리와 등은 꼿꼿하고 양 손은 양 무릎 위에 놓였다. 살짝 가벼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바다 위에는 거대하고 둥근 흰 섬광이 있다. 그것은 예외적인 구름이거나, 공중을 나는 흰 배이거나, 조용하게 정지한 폭발이거나, 비정상적으로 큰 새이거나, 시각적인 불안이거나, 지금 막 열린 어떤 미지의 문처럼 보인다. 우리는 정면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를 보지 않으면서 말하고, 그는 내 말을 들으면서 동시에, 입을 움직이지 않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의 말은 서로 겹치고 뒤섞이며 구별되지 않는다. 그렇게 평행하며 혼재하는 우리의 기이한 이중창의 대화 도중, 간혹 바람이 불어와 우리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움직이고, 그때마다 제3의 목소리가 간혹 불규칙적으로 끼어든다.(12쪽)
*
파도가 밀려와 우리의 몸을 적시기 시작하지만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파도가 점점 밀려와 앉아 있는 우리의 몸 위로, 가슴 위로, 마침내는 목까지 물이 차오르지만,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파도가 점점 밀려와 마침내 우리의 머리가 물 속으로 잠기기 시작한다.
파도가 점점 밀려와 마침내 우리의 형체를 완전히 집어삼킨다.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단지, 나는 하나의 노래를 가졌다. 나는 하나의 춤을 가졌다. 나는 하나의 바다를 가졌다. 빛이 산산이 부숴지는 수면 위로 흰 새의 형태를 가진 목소리가 날아간다. 그날 바닷가에서, 죽기 전의 싱그러운 젊은 처녀인 친척 여자에게, 나는 입맞추었던가. 구부러진 가운데 손가락을 가졌으며, 파도처럼 부서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집을 나갔던 내 최초의 여인, 그녀는 나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대신 웃음을 멈추지 않으면서, 해변의 새들을 향해서 발길을 돌린다. 그러나 새를 보고 있는 건 아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엄마. 내 입에서는 생애 최초의 말이 흘러나오지만, 나와 그녀, 둘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30쪽)
- 배수아, 「나는 하나의 노래를 가졌다」 중에서(배수아 외,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미디어버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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