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배수아 외,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미디어버스, 2020.

시월의숲 2021. 2. 13. 21:07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와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지금에서 그것을 지치지 않고 찾아내는 사람들은 이미 미래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와야 할 것들에 몰두하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이들은 와야 할 것이라 믿는 것들을 이미 연습을 통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어떤 시간들을 뭉쳐지고 합해지고 늘어나고 누워있고 미래는 꼭 다음에 일어날 것이 아니고 과거는 꼭 지난 시간은 아니에요.(50쪽, 박솔뫼, '매일 산책 연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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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깊은 물속에서 올라온 줄에 손목이 묶인 

수억만 개의 손가락입니다.(92쪽, 김혜순, '해운대 텍사스 퀸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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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집안에 있는 건 슬픈 일이고 자기 자신의 삶에 근저당이 잡히는 셈이었다. 죽음이라는 채무자가 언제 들이닥쳐 일상을 뒤흔들지 몰랐다. 그게 자기 자신의 죽음이면 의식이 꺼지면 자연스레 종료지만, 타인이라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채무 상태에 놓이게 된다. 기억이 있으니까. 타인에 대한 기억이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채무로, 우리를 조여오는 것이었다. 수 년 전 엄마를 떠나보내며 느낀 것이었다.(142~144쪽, 김금희, '크리스마스에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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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세상은 놀랍도록 정확하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적도, 총알도, 수류탄 파편도 망상의 세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엄연하고 잔인한 실재다. 실재는 심장을 관통하고, 허파를 찢으며, 뼈를 부순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실재의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안테나를 올리듯 몸의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고 관찰을 해야 한다. 공포를 이기고 총알이 날아오고 있는 방향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야 실재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 감각이 무뎌진다. 그리고 무뎌진 감각은 현실을 오해한다. 마치 총알이 자기만 피해 갈 것처럼 호기를 부리고 까불기 시작한다. 객기에는 언제나 대가가 있다. 전쟁터에서 까분 사람도, 바다에서 까분 사람도 모두 죽었다.(242쪽, 김언수, '물개여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