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W. G. 제발트, 《자연을 따라. 기초시》, 문학동네, 2017.

시월의숲 2021. 7. 25. 21:35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한번 해보기,

이것이 자연의 유일한 목표다. 발아,

성장, 그리고 번식,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그리고 

우리 머리에서 나온

쓰레기 더미에 불과한 기계를 통해서도.(37쪽)

 

 

*

 

 

험악한 사건으로 점철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알프스산맥의 북쪽 기슭에서, 외면적으로는

파멸의 개념을 모르는 채로 자라났다.

그러나 자주 길에서 넘어져

다친 손에 붕대를 감고

푸크시아 관목 곁 창가에 앉아

몇 시간이고 꼼짝없이 창밖만을 쳐다보고 있을 때

너무 일찍 나를 엄습해온

눈앞에 고요히 떠오르던 

소리 없는 재앙의 예감.

그때 창밖의 채마밭에는

빳빳하게 풀 먹인 흰 두건을 쓴 수녀들이

느릿느릿 채마밭 이랑 사이를 움직였는데,

막 깨어난 애벌레들과 겹쳐지며

뇌리에 새겨진 그 광경으로부터

나는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108쪽)

 

 

*

 

 

서퍽 지역의 황무지 위로

광기의 속삭임이

퍼져나간다. 이것은

약속된 종말인가?

오, 돌로 된 인간들아.

이미 죽은 것은, 죽은 채로

머물러 있으리라. 삶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일지니.

지금 나에게 말하는 

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뭐라고? 어떻게?

어디서 언제 말인가? 이제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가,

아니면 전부인가?

물은? 불은? 선은?

악은? 삶은? 죽음은?(134쪽)

 

 

*

 

 

어떤 사람은 매혹당할 운명으로 태어나 문학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그는 마지막 날까지 자신을 매혹시킬 것을 찾아서 헤맨다. 문학을 헤매는 것은 여행지를 헤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문학이라는 외국에서 영영 머문다. 

독자란 끝내 알지 못할 것을 가장 사랑하며, 일생 동안 그것이 그리워 우는 존재이다. 만약 그 신비의 제단에 우연히, 혹은 누군가의 손길에 끌려 아주 잠깐 발을 들이게 되면, 우리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리하여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종류의 글에서, 되풀이하여 언급하고 싶어질 것이다.(144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

 

 

제발트의 작품을 꼼꼼히 따라 읽은 독자라면, 그의 전 작품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암시와 이미지, 숨겨진 디테일 들을 이 책에서 어렵지 않게 재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제발트를 깊이 읽어온 독자들은, 그가 오직 하나의 작품을, 언제나 은밀하게 다른 방식으로 반복해서 써왔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147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