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필로소픽, 2014.

시월의숲 2021. 6. 7. 21:59

나는 내 생애에 단 한 번도 책 한 권을 완전히 다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나의 독서 방식은 고도의 기술로 책장을 넘기는 사람, 즉 읽기보다 책장 넘기기를 더 좋아하는, 그래서 한 쪽을 읽기 전에 아마도 수백 쪽을 뒤적거리는 그런 방법이지요. 그러나 한 쪽을 읽으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아주 철저하게 그리고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열정으로 읽습니다. 내가 독자이기보다는 오히려 책장을 넘기는 사람임을 당신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책장 넘기는 것을 읽는 것만큼 좋아합니다. 나는 다 읽지는 않았지만 수백만 번도 더 책장을 넘겼습니다. 그렇지만 책장을 넘길 때에도 항상 읽을 때와 같은 기쁨과 실제적인 정신적 쾌감을 느꼈지요. 책 한 권을 전부 다 읽지만 단 한 쪽도 철저하게 읽지 않는 독자보다는 사백 쪽짜리 책 한 권에서 통틀어 단 세 쪽을 더 완전하게 읽는 것이 정말 더 낫습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 마치 비행기 승객이 비행기가 지나가는 곳 아래쪽 경치를 모르는 것과 똑같이, 마지막에 그가 읽은 책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 그런 보통의 독자들이 책 전부를 읽는 것보다는 한 책의 열두 줄을 집중하여 읽는 것이 더 좋지요. 보통의 독자는 그 책의 윤곽조차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렇게 오늘날 사람들은 신속하게 모든 것을 읽어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읽지만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30~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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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작품은 우리를 끊임없이 파괴로 위협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멸망시킵니다. 여기 걸작이라는 이름으로 벽에 걸려 있는 모든 것이 그러하지요 하고 레거는 말했다. 나는 완성된 것, 완전한 것은 결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여기 걸려 있는 소위 완성된 작품에서 완결되지 않은 어떤 것을 끄집어낼 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갑니다. 물론 이때에 나는 이 작품들 안에서 흠이 되는 허점과 그 예술가가 실수한 결정적인 부분을 발견할 때까지 찾는 것입니다.(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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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당신이 더욱 철저하게 읽으면, 당신이 읽는 모든 것은 파멸합니다. 당신이 무엇을 읽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마지막에 가서는 모두 우스꽝스러워지며, 결국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예술 작품에 깊이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모든 것, 심지어는 가장 좋아하는 것조차도 파멸합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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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을 내려다보고 사람들을 주시하면서,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엇인가, 저 아래 길에서 움직이는, 활동하는 저들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소위 나의 주된 일입니다. 나는 항상 전적으로 사람만 다루었습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자연 그 자체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내 안의 모든 것은 언제나 사람에게만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는 소위 인간에 미친 사람입니다. 오로지 사람만이 언제나 나의 관심거리였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내게 천성적으로 반감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사람에게만큼 그렇게 강렬하게 애착을 느낀 것은 달리 없었지만 그러나 동시에 사람 외에 그 무엇에도 그렇게 철저하게 거부 반응을 일으킨 적도 없습니다. 나는 사람을 증오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나의 유일한 인생의 목적입니다.(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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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시절은 절망의 시간 외에 달리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부모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나도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나를 원하지 않았음에도 내가 태어났다는 것 때문에 나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한 평생을 두고 그들은 나를 낳았다는 사실 때문에 나를 견디지 못했지요. 만일 지옥이 있다면, 물론 지옥이 있지만, 나의 어린 시절은 지옥이었습니다. 어떤 어린 시절이든 모두 똑같이 어린 시절은 지옥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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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기의 글을 오랫동안 발표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가 쓴 글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데 호기심을 보이지 않는 작가나 아니면 적어도 글을 쓰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것을 갈망합니다 하고 레거는 말하면서, 비록 내가, 나는 그것을 열망하지 않아, 그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대중의 생각에 대해서는 전혀 호기심이 없어, 라고 늘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을 갈망합니다. 끊임없이 갈망하는 그 순간에 내가 그것에 관심이 없다고 이야기하면 거짓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언제나 그것을 부단히 갈망합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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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예술로 살짝 도망가 버렸습니다. 나는 가장 좋은 순간을 기다렸으며 그리고 그 가장 좋은 순간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나와 예술의 세계로 슬쩍 도망쳐 갔습니다. 음악으로 말입니다.(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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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하는 것은 아주 나쁜 습관인데, 양심의 가책이나 흔히 볼 수 있는 고립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 선물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며, 선물한 물건은 소중하게 취급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더 많았어야 했는데, 라고 생각하다 결국에는 미움만이 남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내 생애 동안 단 한 번도 선물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선물 받는 것도 항상 거부했습니다. 정말 나는 한평생 선물을 받게 될까 봐 두러워했습니다.(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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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단순히 밝혀내 비난하고 당연히 과장해서 보도하지만, 곧 눈치를 봐서 없었던 것으로 하고는 비굴하게 잊어버립니다. 신문은 들추어내는 자이며 선동하는 자이지만 동시에 정치적인 추악함과 범행에 관해서는 숨기는 자이자 덮어 버리는 은폐자이지요 하고 레거는 말했다.(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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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음악 때문에 살아갑니다. 음악이 언제나 내 안에 살아 있으며 그리고 그것이 내 안에서 변함없이 처음 그대로 살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 음악을 통해 그 추하고 불결한 모든 것을 매일 새롭게 하고, 음악을 통해 매일 아침에 그래도 다시 생각하고 느끼는 인간이 되지요, 그건 정말 그렇습니다, 아시겠습니까! 하고 그는 말했다. 그래요, 비록 우리가 음악을 지긋지긋해하고 때로는 우리에게 완전히 쓸데없어 보이고, 더 이상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해도 말입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 아, 예술, 해가 갈수록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더 확실해지고 이 지구 표면을 예술적으로 치장하려는 불쌍한 노력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소위 옛 거장들의 그림을 보면, 그래도 다른 것도 아닌 바로 이 지긋지긋하고 터무니없고 게다가 자주 구토를 일으키게까지 하는 이 불쾌한 예술이 그래도 우리를 구하지요 하고 레거는 말했다.(184~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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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을 타는 것은 모두 거부합니다. 분명 나는 내가 말하는 예술 이기주의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나는 예술에 관련된 것은 모두 나 혼자 차지하려고 합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소펜하우어, 파스칼 그리고 노발리스 게다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골을 혼자서만 독차지하려고 합니다. 단지 나 혼자서 이 예술품을 소유하려 하지요. 이 천재적인 예술 작품을 말입니다.(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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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수십 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한 사람에게 익숙해지고 그 사람을 사랑하며 결국에는 다른 모든 것보다 더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 사람에게 우리 자신을 묶어 버립니다. 그러다 그 사람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정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나는 항상 내게는 음악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끔씩은 철학이 그렇다고 생각했고, 뛰어난 최고의 글들이, 또 예술이 다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이 세상에서 둘도 없이 사랑한 그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너무도 큰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됩니다. 그 사람이 죽은 후에 그것에 계속 시달리다 어느 날 숨 막혀 죽게 되는, 무서운 양심의 가책 말입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 내가 한평생 모아서 이 징어가의 집으로 가져온 이 책과 글을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는 홀로 남아 있었고 모든 책과 글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습니다.······우리는 결정적인 순간, 그러니까 우리 삶의 중대한 순간에 이 중요한 사람과 위대한 사람에게 언제나 그러듯이 의지할 수 있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바로 그 삶의 결정적 순간에 우리는 이 모든 중요한 사람 그리고 위대한 사람, 소위 영원한 이들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삶의 결정적 순간에 우리에게 주는 것이라고는 그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우리는 혼자이며 큰 어려움에 빠져 있다는 사실뿐입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216~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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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람을 증오합니다. 그럼에도 그들과 함께 있으려고 하지요. 그것은 우리가 오로지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만 계속 살아갈 수 있으며 미쳐 버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는 혼자 있으며 고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스스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망상입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 우리는 사람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어떤 유일한 사람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단지 혼자 있어야만 성공을 한다고 스스로 믿는데, 그러나 그것은 망상입니다. 혼자서는 최소의 생존 기회마저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 여전히 아주 많은 사상가와 옛 거장들을 삶의 동반자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 마지막에 가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특히 소위 이 위대한 사상가와 옛 거장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며 그들로부터 조소당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220~2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