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김한민, 《페소아》, 아르테, 2018.

시월의숲 2021. 10. 3. 19:52

우리에게는 '영향을 선택할 권리', 좋은 영향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 선택의 폭은 늘 우리가 원하는 만큼 넓지 않고, 그 선택권은 전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타협을 거쳐야 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우리는 태어난 곳에 고정되어 살아가는 식물이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동물이기에, 우리가 받는 영향들을 선택하는데 참여할 수 있고, 이미 참여하고 있다. 환경 결정론자들도 인간이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환경을 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나는 내가 영향받을 사람과 환경을 최대한 능동적으로 택하고 싶었고, 고민과 타협 끝에 포르투갈과 페소아를 선택했다. 다행히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결정하는 것은 영향의 초기인자들일 뿐, 그 결정의 의미와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페소아의 마지막 말처럼, 우리는 내일이 무엇을 가져다줄지 전혀 모른다. 나도 한때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인물을 이만큼 내 삶에 깊숙이 받아들이게 될 줄 몰랐다.(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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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페소아에게 매료되는 요소를 하나만 꼽으라면 뭐니 뭐니 해도 이명이다. 페소아와 관련된 대중 행사의 질의응답 시간에는 늘 이명에 관한 질문이 주를 이룬다. 여기에 '페소아'라는 말이 포르투갈어로 사람을 뜻한다는 점, 그 어원인 페르소나가 가면을 의미한다는 점, 문학적 정체성이 여럿인 사람이 하필이면 그리 흔하지도 않은 이 성을 타고났다는 기막힌 우연, 또한 페소아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면 '페르손느'가 되고 이는 '아무도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는 점 등이 더해지면, 이 이야기만으로도 문학 애호가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심지어 페소아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채 이명이라는 아이디어만 듣고 그에게 빠져버리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니 그 매력은 부정할 수가 없다.(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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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그 먼 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리처드가 확인한 것은, 페소아가 어릴 때부터 머릿속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여행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이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여행자의 의욕을 꺾는다기보다는 떠나지 못하는 이를 위한 격려에 더 가깝다. "여행? 살아 있는 자라면 누구나 여행할 수 있다. 나는 내 육신 혹은 운명이라는 기차를 타고 날마다 한 역에서 다른 역으로 여행을 떠난다."(『불안의 책』, 텍스트 451) 페소아를 좋아하고 그의 여행관에 동의한다면, 또 머릿속 상상만으로 여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리스본까지 오지 않아도 자기가 있는 그곳, 즉 책상과 소파, 침대에서, 수고스럽고 비싼 여행을 온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보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으리라.(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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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집요하게 묻는다. 그래서 페소아가 동성애자였다는 건지 아니면 양성애자였다는 건지. 아무도 모른다. 중요하지도 않다. 게다가 그 자신도 불확실했던 것 같다. 위의 시구를 받아들이자면, 우리는 모르기에 사랑할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그 모름, 그 불분명함보다 페소아스러운 것도 없다. 정치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라면 그 누구 못지않게 불분명했던 그가 유독 성정체성만 분명했다면 그게 더 이상했으리라. 나는 최소한 그가 무성애자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자기성애자'라면 모를까.(180~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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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엇에나 잘 빠져든 만큼 쉽게 지루해했다. 어떤 신념 체계에도 완전히 정착할 수 없는 영혼의 소유자였던 그가 정처 없는 '숨은 그림 찾기' 끝에 지쳐 닻을 내린 곳은 자기 자신이었다.

 

"나는 지금 나 자신을 숭배하는 종교 안에서 금욕 중이다. 커피 한 잔과 담배 한 개비와 나의 꿈들이, 우주와 별과 일과 사랑과 심지어 아름다움과 영광을 훌륭하게 대체한다. 나에게는 자극이 거의 필요 없다. 나는 내 영혼 안에 충분한 아편을 갖고 있다." - 『불안의 책』, 텍스트 251

 

독실한 신자가 되기에는 너무나 까다롭고 복잡하고 변덕스러웠으며, 무언가 길들여지기에는 너무나 섬세한 방식으로 반항적이었던 페소아. 그가 유일하게 믿었던 것이 있다면, "유일한 신비는, 우주에 신비가 있다는 사실"뿐이다.(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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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출증과 관음증이 절묘하게 결합한 소셜 미디어의 시대에 만약 페소아가 태어났더라면, 수십 개의 아바타를 만들어 몰래 소셜 네트워크 활동을 즐겼을까, 아니면 등을 돌렸을까? 출판이 되건 안 되건, 피드백이 있던 없건, 인정을 받건 못 받건, 죽는 날까지 자신이 구축한 세계 속에서 시어 하나, 생각 하나, 시상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인생을 소진한 그가 이런 '대세'에 호의적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3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