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황정은, 《파씨의 입문》, 창비, 2012.

시월의숲 2022. 1. 15. 15:40

나는 죽은 뒤에 뭔가 남는다거나, 다시 태어난다는 거 믿지 않아. 

왜.

믿고 싶지 않으니까.

어째서.

가혹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아.

뭐가 가혹해.

예를 들어, 네가 죽어서 나한테 붙는다고 해도 나는 모를 거 아냐.

모를까.

모르지 않을까.

사랑으로 알아차려봐.

농담이 아니라, 너는 나를 보는데 내가 너를 볼 수 없다면 너는 어떨 것 같아.

쓸쓸하겠지.

그거 봐. 쓸쓸하다느니, 죽어서도 그런 걸 느껴야 한다면 가혹한게 맞잖아. 나는 이 생에 살면서 겪는 것으로도 충분하니까, 내가 죽을 때는 그것으로 끝이었으면 좋겠어. 이왕 죽는 거, 유령으로 남거나 다시 태어나 사는 일 없이, 말끔히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얘기야.

그건 너무 덧없다고 내가 말하자, 덧없는 편이 낫다,라는 것이 유도 씨의 대답이었다. 죽어서도 남을 쓸쓸함이라면 덧없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었다.(56~57쪽, '대니 드비토')

 

 

*

 

 

죽는 순간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죽었다면 그것은 좋은 죽음인 걸까.

...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그의 죽음을 두고 호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살아서 누린 나이가 팔십팔세나 되었으므로 마땅히 호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되어 죽었으므로 호상이라면 호상의 의미란 결국 죽은 사람의 처지가 아니고 산 사람의 처지에서 정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63쪽, '낙하하다')

 

 

*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잘 죽고 싶다고 대답한 적도 있다. 장래희망이 죽는 것이냐고 되묻는 사람에게 죽고 싶은 것이 아니고 잘 죽고 싶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을 때만은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름엔 복숭아를 듬뿍 먹고 가을엔 사과를 양껏 먹을 수 있는 정도로 만족하며 살다가 양지바른 곳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느닷없이 불에 타거나 물에 쓸려가거나 무너지는 건축물에 깔리는 일 없이, 조금 더 바란다면 길고 고통스러운 병에 시달리지 않고 죽음을 맞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자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내게 요즘처럼 사람의 죽음이 험한 세상에서 평생을 좋은 일을 하고 정갈하게 살아도 찾아올까 말까 한 지복을 바라는구나 너는, 하며 웃었다. 그 정도가 지복이라면 요즘의 인생이란 서글픈 것이로구나, 지나가듯 생각했다.(64쪽, '낙하하다')

 

 

*

 

 

애초 빗방울이란 허공을 떨어져내리고 있을 뿐이니 사람들이 빗소리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빗소리라기보다는 빗방울에 얻어맞은 물질의 소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런 물질에도 닿지 못하는 빗방울이란 하염없이 떨어져내릴 뿐이라는 이야기였다. 생각해보세요, 야노 씨는 말했다. 허공을 낙하하고 있을 뿐인 빗방울들을 생각해보세요.(66쪽, '낙하하다')

 

 

*

 

 

지옥이란 생전에 자신이 가장 무섭다고 생각했던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일지도 모른다. 각자가 무서워서 사로잡힌 어떤 것들로 넘쳐나는 세계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 어떤 사람에게는 미친 엄마 어떤 사람에게는 굶주림 어떤 사람에게는 침묵 어떤 사람에게는 돼지들 어떤 사람에게는 방법도 없이 견뎌야 하는 추위 어떤 사람에게는 싸이렌 어떤 사람에게는 달걀 속의 뼈 어떤 사람에게는 편협한 전도사의 눈길에 구현된 신의 눈. 이런 것들이라면 반드시 죽은 뒤 도래하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나.(71쪽, '낙하하다')

 

 

*

 

 

외롭고 두려운 것도 관성이 되었다.

관성적으로 외롭고 두렵다.

외롭고 두렵고 무엇보다 지루하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진다.

...

누가 누가 누가 없어요 나와 나와 나와 충돌해줘.(77쪽, '낙하하다')

 

 

*

 

 

계산대를 향해 몰려드는 물건들의 값을 계산하는 일은 물건을 상대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사람만큼 피곤한 것이 없었고 써비스 직원을 상대하는 고객만큼 거칠 것 없게 공격적인 사람들도 드물었다.(163쪽, '디디의 우산')

 

 

*

 

 

난 오늘 종일 생각했어, 도도.

뭘.

돈에 대해서.

그거라면 나도 늘 생각하지.

뭐라고 생각하는데?

돈이 없구나, 하고 도도가 말했다. 디디는 도도를 바라보며 밥을 씹다가 컵을 집어 물을 마셨다. 저 말이야 도도.

돈이 있으면 더 살고 돈이 없으면 덜 산대.

그건 그렇지.

그게 그런가.

돈이 문제지.

돈.

돈이 언제나 문제가 되지.

디디는 젓가락으로 밥을 조금 집이서 탁자에 놓았다.

돈.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도록 만드는 어떤 것들.

어떻게 생각해, 하고 디디는 조그만 밥 무더기 네 개를 탁자에 늘어놓고 도도에게 물었다.

어느 것이 정말 문제일까.

응?

이 가운데 어느 문제가 가장 문제라서 돈이 항상 문제가 된다는, 뭐랄까 좆같은 답이 나오는 걸까. 나 오늘 종일 그걸 생각하고 있었어.

뭐 좆?

응.

도도가 눈을 깜박이며 디디를 보았다.

뭐?

돈, 하며 디디는 무더기들을 보고 있다가 오른쪽부터 차례로 집어서 입에 넣었다.(174~175쪽, '디디의 우산')

 

 

*

 

 

그는 여전히 장의 얼굴을 분명하게 떠올릴 수 없었으나 그것보다는 분명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촉각에 남아 있었다. 만지고 닿아서 느낀 것들. 만지고 만지고 만져서 손바닥으로 기억해둔 몸의 요철. 세포에 남았으므로 잊을 수도 없었다.(195쪽, '뼈도둑')

 

 

*

 

 

어느 쪽에서 들려왔는지는 몰라도 거시기한 관계,라는 속삭임이 들려왔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다시 왈그락 덜그럭. 장은 입에 든 것을 꼼꼼하게 다 씹은 뒤 장과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부부를 향해 돌아앉았다. 그렇게 궁금하세요 그렇습니다 이 새끼가 나한테 넣고 내가 이 새끼에게 넣습니다 안심하세요 내게도 취향이라는 게 있다 나는 당신들에겐 조금도 넣고 싶지 않습니다.(198쪽, '뼈도둑')

 

 

*

 

 

야.

파씨의 사춘기 급우들이 파씨를 부릅니다.

그들은 파씨에게 바지가 그것밖에 없느냐고 묻습니다.

네.

파씨가 대답합니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아 깜짝이야 파씨도 그걸 지금 알았지만 파씨에게 주어진 바지는 이것뿐입니다. 파씨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그 바지만을 입고 학교에 다니고, 일요일엔 아무런 바지도 입지 않는데, 그래서 뭐가 문제일까, 이 씨발년들은 무슨 자격으로 파씨에게 바지가 그것밖에 없느냐고 묻는 것일까. 파씨가 입을 수 있는 바지가 몇벌인가, 파씨에게 허락된 바지가 몇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나다는 듯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고 있는 인간이라면 눈꺼풀 정도는 뜯어내고 괜찮지 않을까. 멘털도 아니고 머티어리얼로 멘털을 구부리는 데서 재미를 얻으려 하는 인간이라면 바닥에 떨어진 눈꺼풀을 눈꺼풀이 떨어진 눈으로 내려다봐야 하는 눈꺼풀적인 고통의 맛 정도는 봐도 괜찮지 않을까.(218~219쪽, '파씨의 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