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으려 할수록 기억은 선명히 살아난다. 누가 그랬다. 원하는 걸 가질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결코 잊지 않는 것이라고."
- 왕가위, 『동사서독』 중에서 구약봉(장국영)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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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다. 늘 그렇듯, 언젠가는 보게 되겠지, 했다. 그리하여, 이제야, 드디어,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왜 이 영화가 계속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같은 감독의 <일대종사>나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처럼 화려하고 감각적이며 잘 짜인 무협 영화 한 편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가 기존의 무협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기대한다면 반드시 실망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유수의 배우들과 예고편에서 느껴지는 어떤 느낌 때문에, 일말이라도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화려한 무협 액션에 대한 기대라기보다는 그것을 얼마나 왕가위 스타일로 구현했을까, 였다.
처음 이 영화를 보기 시작해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날 때까지 나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이입할 수 없었다. 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고,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이 너무 과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의 과잉도 시간이 지나고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의 관계와 사건의 잔상이 드러날 때쯤, 하나의 스타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나름 즐기게 되었다.
이 영화는 내 예상대로 무협 영화의 외피를 두른 사랑이야기였다. 왕가위식 사랑 이야기가 무협이라는 장르와 만나니 이런 식으로 표현될 수 있구나 생각했다. 칼은 그저 칼일 뿐,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언어)로, 표정으로, 눈빛으로 칼싸움을 대신한다. 하지만 그 말들, 표정들, 눈빛들은 얼마나 무협적(!)인가.
<해피투게더>처럼 전체적으로 노란색 톤이 인상적인 영화다. 사막이 배경이기도 하거니와 처음부터 끝까지 노란색의 필터로 모든 사물을 보는 듯한 영상미는 어떤 나른함과 고독감, 쓸쓸함을 한층 더 배가시킨다. 마치 <바그다드 카페>처럼. 보고 있으면 목이 타고, 때로 큰 숨을 들이쉬게 되는 것이다.
배우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에는 우리가 아는, 그 시절의 배우들이 다 나온다. 그들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은 이 영화를 보는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장국영은 말할 것도 없고, 양조위, 양가휘, 장학우, 임청하, 장만옥 등. 왕가위 감독의 역량인지, 배우들의 능력인지 모르겠지만, 영화 속 그들의 눈빛은 왜 그리도 고독하고 쓸쓸해 보이는지. 때로 감정 과잉처럼 보이는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대사가 납득이 되었던 것도 어쩌면 그들의 고독한 눈빛 때문이었으리라.
<해피투게더>에 이어 양조위의 고독한 눈빛은 가히 잊을 수 없다. 희한하게 장국영 때문에 보기 시작한 영화들이 결국엔 양조위의 눈빛으로 귀결되다니. 그게 장국영과 양조위가 가진 매력의 차이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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