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밀란 쿤데라, 《농담》, 민음사, 2011.

시월의숲 2023. 8. 23. 22:25

"변질된 가치나 가면이 벗겨진 환상은 똑같이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고, 서로 비슷하게 닮아서 그 둘을 혼동하기보다 더 쉬운 건 없죠."(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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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 당신은 잘못 살고 있군요, 그러고 나서 그는 선언했다,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다르게 살겠노라, 삶의 기쁨들을 좀 더 누리겠노라 결심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답했다, 나는 그의 말에 조금도 반대하지 않으며, 언제나 기쁨을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요즘 유행하는 그 모든 우울한 것들이나 울적함 같은 것보다 나를 더 짜증나게 하는 것은 없다고, 그러자 그는 그런 신념의 선언은 아무 의미도 없다, 기쁨의 신봉자들이 대개 제일 음울한 사람들이다라고 답했다,(4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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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기억들로부터 달아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기억들은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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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것은 옷을 다 벗고 그 자체로, 자신 본래의 진짜 모습으로 내게 오고 있었고 나로 하여금 그것을 자신의 진정한 이름으로 부르게 만들어(이제 나는 순수한 시간, 순수하게 텅 빈 시간을 살고 있었으므로) 내가 단 한순간도 그것을 망각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생각하고 끊임없이 그 무게를 느끼도록 하고 있었다.(93~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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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이란 그렇게 한심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데서 오는 슬픔, 우리 모두 혹은 거의 모두는 그 슬픔을 알고 있었다.(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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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한쪽 손을 들었는데, 그것은 마치 그런 몸짓을 한 번도 해 본 적도 없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모르며, 단지 작별 인사로 손을 흔든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어서, 어색하지만 그 동작을 해 보기로 결심한 사람이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120~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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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른 이들보다 더 낫다는 그 어떤 보장도 내게서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과 나의 관계에 무슨 변화를 줄 수 있는가? 나 자신의 한심함을 인식한다고 해서 나와 비슷한 이들의 한심함과 내가 화해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타인에게서 자기 자신의 비천함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서로 형제처럼 결속된다든가 하는 일만큼 내게 역겨운 것은 없다.(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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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서 턱 세워 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 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 연기를 한다.(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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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이란 참혹한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희랍 비극 배우의 장화를 신고 다양한 무대 의상 차림으로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면서 광적으로 신봉하는 대사들을 외워서 읊으며 누비고 다니는 그런 무대다.(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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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만든 것들은 모두 고양이나 개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지. 그건 사물이라기보다 살아 있는 어떤 존재들이거든. 난 나무의 세계가 좋아. 그 속에서만 난 내 집에 있는 것 같아."(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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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시절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과시하고 다니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미래 자체와 어떤 비밀 협약을 맺어 그 이름으로 행동할 위임장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236~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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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것은 적이 아니라 친구이므로.(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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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우리에게 말을 하고 점진적으로 어떤 비밀을 드러내 보여 준다는 믿음, 삶은 해독해야 할 수수께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믿음, 우리가 겪는 일들은 동시에 우리 삶의 신화를 형성하며 또한 이 신화는 진실과 불가사의의 열쇠를 모두 지니고 있다는 믿음. 그것은 환상일 뿐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주 그래 보이기까지도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해독해야만 하는 이런 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다.(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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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알지 못하는 채로 당신을 기다려 왔다는 걸.(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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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하는 것이 단 하나밖에 없었다. 즉 이제 다가올 순간들이 오지 않기를, 또는 이런 내 소망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적어도 이 순간들이 무의미하게 되어 버리기를, 아무 무게도 없고, 먼지보다 가벼운 것이 되어 버리기를 바라는 마음밖에 없었다.(333~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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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에 대한 분노의 파도, 당시의 내 나이에 대한 분노의 파도가 나를 온통 집어삼켰다. 자기 밖에 놓인 수수께끼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너무도 커다란 수수께끼인 그런 나이, 또한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해도) 자기 자신의 감정, 자신의 혼란, 자신의 가치 등을 놀랍게 비추어 주는 움직이는 거울에 불과한 그런 바보 같은 서정적 나이에 대한 분노였다.(420~4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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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수로 생겨난 일들이 이유와 필연성에 의해 생겨난 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4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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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 버리고 만다.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인이 되었던 주요 인물들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 버린다. 그 인물들은 사실상(자동 보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움직인다.)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닌데, 복수의 신화 속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4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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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4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