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은 따뜻하고 조용하다. 시계가 없어도 무음 속에서 시간은 흘러간다. 발소리를 죽이고 담장 위를 걸어가는 야윈 고양이처럼.(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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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 완전한 것이란 없어,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형체를 지닌 것이라면 무엇이든 반드시 약점이나 사각이 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는다.
"이 벽은 누가 만들었나요?" 나는 묻는다.
"아무도 만들지 않았어"라는 것이 문지기의 굳건한 견해였다. "처음부터 여기 있었지."(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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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꿈 얘기를 쓸게.
이 꿈에는 네가 조금 나왔어. 그다지 중요한 역할이 아니라 미안한데, 꿈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도 그럴 것이 꿈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여기요' 하고 건네주는 거고, 나 혼자서 내용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으니까(아마도). 그리고 어느 연극이나 영화에서든 조연은 중요하잖아. 조연에 따라 그 연극이나 영화의 인상이 상당히 달라지지. 그러니까 비록 주연이 아니더라도 좀 참아주고,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같은 걸 목표로 삼기를.(56~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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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무척 평온하다. 바람다운 바람도 불지 않고 작은 파도가 소리 없이 규칙적으로 해변에 밀려온다. 마치 널어놓은 시트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우리는 언제까지고 그곳에 앉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가 어디로 향하려 하는지, 어디로 향하면 좋은지, 그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는 그 해변에 우산을 나눠 쓰고 앉아 있음으로써 이미 완결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완결된 것이 새삼 몸을 일으킨다 한들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이 영겁이 지닌 한 가지 문제점인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어디로 향하면 좋을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영겁을 추구하지 않는 사랑에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단 말인가?(79~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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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너는, 내가 그날 아침 전철에서 너를 두고 성적인 상상에 빠졌던 걸 알아차리고―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그처럼 꼴사나운 짓을 하는 나를 더는 보기 싫어진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부끄러워서 귓불이 달아오른다. 그런 건 어쩔 수 없어, 라고 나는 열과 성을 다해 너에게 설명하고 변명한다. 그건 시커먼 대형견 같은 거야. 한번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손쓸 도리가 없어. 아무리 튼튼한 목죽을 매어 잡아당겨도―(8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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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 네가 말한다.
나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린다.
"네 것이 되고 싶어." 너는 속삭이듯 말한다. "뭐든지 전부, 네 것이 되고 싶어."(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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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가 무언가의,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너는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듯 말한다. "여기 있는 나한테는 실체 같은 게 없고, 내 실체는 다른 어딘가에 있어.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언뜻 나처럼 보여도 실은 바닥이나 벽에 비친 그림자일 뿐······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어."(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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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잘 지내? 계절이 바뀌고 있어. 주위 풍경이 전과 다르게 보이고 공기의 감촉이 바뀌어가. 아마 나도 조금은 변하고 있겠지. 하지만 어디가 변했는지는 스스로 알 수 없어. 자신에게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마음을 거울에 비춰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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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외톨이로 보낸 여름이었다. 나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쯤이면 지구의 중심에 닿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내려간다. 주위 공기의 밀도와 중력이 점점 바뀌어가는 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고작해야 공기 아닌가. 고작해야 중력 아닌가.
그렇게 나는 더욱 고독해진다.(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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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고야스 씨는 자신이 왜 일상적으로 스커트를 입는지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첫째로는, 이렇게 스커트를 입고 있으면, 네, 왠지 내가 아름다운 시의 몇 행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랍니다."(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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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다보니 하늘은 새파랗게 개었다. 가을에 어울리는 단단한 흰구름이 이야기에 삽입된 몇 가지 단편적인 에피소드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억센 풀냄새가 났다. 그곳은 다름 아닌 풀의 왕국이고, 나는 그 풀들의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는 무례한 침입자였다.
그곳에 혼자 있으면 어김없이 슬퍼졌다. 아주 오래전에 맛보았던, 깊은 슬픔이었다. 나는 그 슬픔을 무척 잘 기억했다. 말로 설명할 길 없는, 또한 시간과 더불어 사라지지도 않는 종류의 깊은 슬픔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가만히 남기고 가는 슬픔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까?(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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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하고 싶은 건 이런 얘깁니다. 티없이 순수한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말하자면 마음의 일부가 뜨거운 빛에 노출된 셈입니다. 타버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더욱이 그 사랑이 어떤 이유로 도중에 뚝 끊겨버린 경우라면요. 그런 사랑은 본인에게 둘도 없는 행복인 동시에, 어찌 보면 성가신 저주이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시겠습니까?"(448~4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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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입니다." 고야스 씨가 나지막히 말했다.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 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4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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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앉는 열람실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는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책을 읽었다. 그건 활짝 핀 꽃에서 한 방울도 남김없이 꿀을 빨아들이려는 나비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꽃에게나 나비에게나, 서로 유익한 행위다. 나비는 영양을 얻고 꽃은 교배에 도움을 받는다. 공존공영,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다. 그것이 독서라는 행위의 훌륭한 점 중 하나다.(5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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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감고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예전에는―이를테면 내가 열일곱 살일 때는 ― 시간 같은 건 말 그대로 무한에 가까웠다. 물이 가득찬 거대한 저수지처럼. 그러니 시간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 시간은 유한하다. 그리고 나이들수록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점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쨌거나 시간은 쉬지 않고 계속 나아가니까.(635~6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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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 위에 놓인 내 손에 그녀가 손을 포갰다. 매끄러운 다섯 손가락이 내 손가락과 조용히 얽혔다. 종류가 다른 시간이 그곳에서 하나로 포개져 뒤섞였다. 가슴 밑바닥에서 슬픔 비슷한, 그러나 슬픔과는 성분이 다른 감정이 무성한 식물처럼 촉수를 뻗어왔다. 나는 그 감촉을 그립게 생각했다. 내 마음에는 내가 충분히 알지 못하는 영역이 아직 조금은 남아 있을 것이다, 시간도 손대지 못하는 영역이.(6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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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것엔 익숙해"라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내뱉는 숨이 딱딱한 물음표가 되어 허공에 하얗게 떠오른다.
나는 기다리는 것에 익숙한 게 아니라, 그저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던 게 아닐까?
게다가 애당초 나는 지금껏 대체 무엇을 기다려왔다는 건가?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정확히 알고나 있었을까?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명확해지기를 그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게 전부인 건 아닐까?(6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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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가 시작되려는 걸까?
나는 무언가가 시작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이 상태가 끝없이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시작된 변화는 ―그게 어떤 종류건 ―더이상 멈출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예감이 들었다.(7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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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어느 쪽이건 상관없지 않나 싶습니다. 내가 나 자신의 본체건, 그림자건. 어느 쪽이 됐건 지금 이렇게 여기 있는 내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내가 곧 나인 거죠. 그 이상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야 할 거예요."(7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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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식과 내 마음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다. 내 마음은 어떤 때는 봄날의 들판에서 뛰노는 어린 토끼이고, 또 어떤 때는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가 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렇다, 마음이란 붙잡기 힘들고, 붙잡기 힘든 것이 마음이다.(7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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