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정지돈,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문학동네, 2021.

시월의숲 2023. 7. 16. 23:02

얼마 전 한 지인이 트위터에 다음과 같이 올렸다. 되면 한다. 응? 다른 지인은 말을 하다가 실수를 했다. 길이 있는 곳에 뜻이 있다. ······그렇다.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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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적인 삶이 재능인가요?

―어떤 경우에는.

그렇다. 어떤 경우에는 망한 인생도 재능이 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인생이 망하지 않았는데 망했다고 느낄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망했는데 희망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중 최악은 뭘까요?(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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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되는 데 가장 필요한 재능은 착각이다. 문장력이 좋거나 머리가 좋거나 인내심이 있거나 책을 좋아하거나 기타 등등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수 있다, 라는 착각이다. 이건 굉장히 슬픈 지점이다. 만약 작가를 만드는 요인이 남다른 언어 감각 같은 실질적인 재능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착각과 자신감이라면, 많은 작가들이 왜 그렇게 덜되어먹은 건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뭔가를 해내는 인간들의 성취 중 많은 경우가 단지 자기 확신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은 세상이 왜 이렇게 엉망인지 알려주는 것 같다. 자기 확신은 완벽한 픽션인데, 사실 인간은 픽션적 존재고 세계(역사)는 픽션의 실현과 재현의 교차로 이루어지므로 픽션에 대한 확신이 그것을 실현시켜주는 원동력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4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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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만드는 도시의 미로 같은 골목과 상점들 속에서 환각과 희열, 공포를 느끼는 '아해'가 되기엔 내비게이션과 지도 앱이 너무 발달했다. 스마트폰 앱만 작동된다면, 새로 생긴 가게가 을지로 어느 구석에 짱박혀 있어도 귀신같이 찾아내는 게 요즘 사람들이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고 도시는 뼈째로 발려 먹혔다. 이제, 아무도, 도시에서, 현기증을, 느끼지 않는다.(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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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은 상상력을 제한한다. 노문학자인 김수환 선생은 내게 여행이나 실제 경험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진짜로 중요하고 흥미로운 건 이상으로 상정한 1세계의 실제 현실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상한 유토피아에 실제로 작용했던 (그들이 머릿속에서 상상해낸) 저곳의 상상계이기 때문이에요." 동시대가 흥미롭지 않은 건 모든 게 개방되고 평평해져버렸기 때문이다(또는 그렇게 착각하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여행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으며 그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세상, 그리고 그걸 산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사회. 그런 면에서 지돈씨는 실제 경험이 아닌 텍스트를 모종의 현실로 치환해서 그 격차를 극화하기 때문에 흥미롭다는 식의 이야기였는데 평소에 내가 생각하고 의도했던 바로 그것이었지만 동시에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여행을 가면 안 되는 걸까? 경험을 하면 오히려 얄팍해지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55~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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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란 본래 남이 읽으면 안 되지만 언젠가는 읽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그건 속마음과 유사하다. 몰랐으면 하지만 알아줬으면 하는 것.(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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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모두 건실한 시민인 양 굴지만 내면에는 다른 욕망이 존재한다.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사라지고 싶은 마음,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드러눕고 싶은 마음(특히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나 시험, 마감이 있을 때). 아무것도 정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미결정 상태,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 유예된 공간에 기거하고 싶은 욕망. 반사회적이고 무가치하고 때로는 위험하게 느껴지는 이러한 상태는 그러나 사실은 동물에 불과한 우리의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계획은 모두 망상에 불과하지 않은가. 산책은 이럴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어디로도 향하지 않으며 걷고 머무는 것.(90~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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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와 발저의 산책이 좋은 이유는 그들이 걷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않았고 우울해하지도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의 산책은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것이었지만 멜랑콜리해지거나 심각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걸을 때만 쾌활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산책과 글쓰기가 가진 유일한 공통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거나 결말을 맺어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상실한 어느 지점에서, 주제와 의도, 인과와 의무를 망각한 지점에서만 진정한 글쓰기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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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대가 사라진 느낌, 미래에 대한 근거가 생각보다 허약했으며 우리는 지금까지 허공을 짚으면서 그게 땅이라고 믿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뭔가를 계획하거나 전망하기보단 중지하게 된다.(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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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나 사태를 파악할 때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는, 그래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속박한다. 다른 쪽에서는 그런 강박은 버리고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면 된다는 생각, 그래서 아주 엉터리로 내용을 해석하거나 나이브한 이해에서 멈추게 만드는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지배한다.···전자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처럼 만들기 때문에 문제적이고(모든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고 정확하게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 후자는 무성의함, 불성실한 태도, 자기변명, 반지성적인 유행을 묵인하기에 문제적이다. 당신이 만약 작품 또는 사태에 반응하고 그 순간의 맥락에서 충실하게 접근했다면 무엇도 부족하지 않다. 다만 충실도를 판단하는 것이 어렵고(이것 역시 불가능에 근접한다)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 뿐이다.(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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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은 특정한 대상이나 시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본성에 저항해야 한다. 가장 가까운 대상이나 친구들에게 저항해야 할지도 모른다. 차별과 혐오는 예외적인 행위가 아닌 일상적인 상태에 가깝다. 그러므로 저항 역시 그래야 한다. 저항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져야 할 상태다.(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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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데자뷰와 건망증을 동시에 겪는다고 누군가 말했다. 이 일을 잊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같아.(149~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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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것을 산책의 아이러니라고 부른다. 꿈꿀 땐 행복하지만 막상 시작하면 피곤한 행위들.(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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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나 오는 곳이 좋고 아무나 오는 곳이 오래 지속되고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아무나의 흔적은 기록되지 않는다. 내가 가던 장소들이 모두 사라진 이유가 그 때문일까. 우리 모두 아무나라서? 하지만 나는 아무나가 좋다.(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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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이지는 1959년 8월 『음악적 만남』에 실린 「무에 관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연이 계속되면 될수록 우리는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며 이는 즐거운 일이다. 제자리에 있는 것은 초조하지 않다.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할 때 초조해질 뿐이다. 우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우리는 서서히 그 어디에도 없게 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212~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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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와 도로가 도시의 순환계이자 신경계라면 극장은 도시의 망상을 상영하는 번연계이며 영화는 뉴런이 직조한 꿈이다. 도시가 토해낸 무의식이 극장 안에서 분출되었고 관객석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낮이고 밤이고 의자에 구겨져 뇌 속에 상영되는 찌꺼기를 가수면 상태로 보고 있었다.(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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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은 이상한 거라서 모두 비웃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모두가 칭송하고 결국 기대고자 하며(기댈 곳은 진정성밖에 없다), 나중에는 누가 더 진심인지 겨루는 승부로 변했다. 그러한 진정성 게임에는 여러 이론과 수사, 실천(증명)이 따르지만 사실상 내용은 없고 (자신만 알고 사랑하는) 스스로의 진실함을 보여주는 말의 향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은 내가 남보다 더 진심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게 목적이 된다. 진심이 정말 증명 가능한 것일까. 더 진짜인 작가가, 예술이, 실천이 있을 수 있을까.(250~2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