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비타 색빌웨스트, 《모든 열정이 다하고》, 민음사, 2023.

시월의숲 2023. 7. 1. 17:18

외모란 얼마나 기이한가, 또 얼마나 부당한지. 인간은 죽을 때까지 외모만 보고 자신을 판단하는 타인을 견뎌야 한다.(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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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완전히 내 멋대로 살 생각이야. 노년을 만끽하려고 말이다. 손주들은 출입 금지야. 너무 어려. 마흔넷 넘은 애가 하나도 없잖니. 증손주들도 출입 금지다. 그 애들은 더 심각하지. 난 괄괄한 젊은 애들은 질색이야. 무슨 일을 하든 굳이 왜 하는지 이유를 알려고 난리지, 묵묵히 하는 법이 없어. 그리고 그 애들이 아기를 낳아도 데려오지 말라고 해라. 그 어린 것들이 별일 없이 삶의 막바지까지 다다르려면 얼마나 치열하게 발버둥질해야 할지 생각나서 괴로울 테니까. 그런 건 다 잊고 살려고 해. 태어난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운 사람들만 곁에 두고 살고 싶구나.(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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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의식, 노년의 감각이란 기이하고 흥미로웠다. 정신은 전과 다름없이, 어쩌면 전보다 더 기민했다. 최후가 임박했다는 생각에 더욱 날카로워지거나, 남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분발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몸만은 다소 위태로워서 신뢰할 수 없었고, 방향 감각도 의심스러웠다.(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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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이 얼마나 특이한 존재인지 그들이 이해하리라고 기대할 수도 없었다. 집은 단순히 벽돌 위에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구조물도, 배관을 뚫고 수평을 맞추고 문과 여닫이창을 뚫어 놓은 건물도 아니다. 집은 자기만의 생각을 지니고 있다. 마치 어디선가 불어온 화합의 숨결이 네모난 벽돌 상자 안으로 흘러들어, 감옥 같은 벽을 무너뜨리고 온 세상에 그 내부를 내보일 때까지 머무는 듯했다. 집이란 아주 사적인 것이었다. 집에는 볼트와 기둥이 축조한 물리적 사적임과는 다른 종류의 사적임이 있었다.(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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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 짚 부스러기, 담쟁이덩굴, 거미 ― 오랫동안 그곳에서 자기들끼리 살았다. 집세도 내지 않고 마음대로 마루와 창문과 벽을 기어 다니며 가볍고 위태로운 생활을 이어왔다. 그것은 레이디 슬레인이 원하는 공존의 관계였다. 소란과 경쟁은, 한 사람의 야망이 다른 사람의 야망을 찍어 누르는 상황은 지긋지긋했다. 빈집으로 흘러드는 존재들과 하나되고 싶었다.(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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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무 살 청년의 삶이란 끔찍한 거예요, 레이디 슬레인. 장애물 경마를 앞둔 기수만큼이나 끔찍해요. 틀림없이 경쟁이라는 개울물에 처박힐 테고, 실망이라는 울타리에 걸려서 다리가 부러질 테고, 호기심이라는 철조망에 발이 묶일 테고,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장애물에 마음 끓이게 될 테니까요. 노인의 삶이란, 경기를 마친 뒤 저녁 무력 침대에 몸을 던지고는 앞으로 경마 따윈 절대 안 하겠다고 다짐하는 기수의 삶이지요."

"하지만 잊으신 것이 있네요, 벅트라우트 씨." 레이디 슬레인은 자신의 과거를 더듬으며 말했다. "젊을 때는 위험하게 사는 걸 즐기면 즐겼지 ― 사실 갈망하지요. ― 저어하지는 않아요."(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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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기 자신이란 정확히 누구였을까? 그녀는 과거의 스스로를 돌아보는 늙은 여자로서 자문했다. 이러한 궁금증은 아주 편안하고 아련한 심심풀이였지만 결코 멜랑콜리는 아니었다. 차라리 최후의 사치, 궁극적인 사치였다. 한평생 누리고 싶었던 사치였다. 이제야 죽음을 유예한 채 이 사치를 만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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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떨어지는 꽃잎을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촉촉하고, 흔들거리고, 청순하고, 열정적이고 넉넉하지만 수줍은 충동에 부풀어 오른 것. 새끼 토끼처럼 겁이 많고, 너무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암사슴처럼 날쌔고 은밀하며, 대기를 무대로 삼은 댄서처럼 발이 가볍고, 다마스크 장미처럼 연하고 향긋하며, 분수처럼 웃음이 가득한 것. 그래, 그것이 젊음이었다. 낯선 집 앞을 서성이는 아이처럼 두려워하면서도, 가슴에 창을 맞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시기.(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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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행복이란 뭔가? 그녀는 행복했나? 행복(Happy)이라는 이상하고 요란한 단어는 영어를 쓰는 사람 모두에게 아주 확정적인 의미를 전달한다. 그 단모음, 발음할 때 침이 튀는 두 개의 'p', 당돌하게 흰 꼬리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y'까지, 그 이상하고 요란한 단어는 단 두 음절로 인생을 송두리째 요약하려 들었다. 행복(Happy). 하지만 사람은 한순간 행복하다가도 돌아서면 불행해진다, 둘 다 별것도 아닌 이유로. 그러니 행복이란 무슨 뜻인가? 그 단어에 별다른 뜻이 있다면 어떤 불안한 사람이 세상을 흑과 백으로, 이분법적으로 보고자 시도했다는 뜻일 것이다. 위험이 가득한 정글 같은 세상에서 작고 비굴한 존재들이 위로가 되는 단어를 찾고자 애썼다는 뜻이리라.(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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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말로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마치 호수의 물을 단단한 공으로 압축하는 일처럼. 인생은 호수야. 레이디 슬레인은 복숭아 향기가 풍기는 따뜻한 남쪽 벽 아래 앉아서 생각했다. 그 잔잔한 표면 위로 수많은 형체를 반사해 내는 호수, 태양이 금빛으로, 달이 은빛으로 물들이는 호수, 가끔 구름이 어둠을 드리우고 파동이 물결을 이루지만 결국에는 잔잔함을 되찾는 호수. 넘치지 않는 수면. 호수, 즉 인생은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작지 않으며 단단하게 압축하기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타인의 인생이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 질문하면서 삶을 압축해 버린다.(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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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적에는 무시하기 일쑤였던 몸의 불편함, 자신만 아는 작은 불편함이 늙어 가면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포악한 잠재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한 포악함이 마음에 들고 흥미로웠다.(146~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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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향한 그의 충심은 흠잡을 데 없었으나 젊은 떠돌이 여행자 피츠조지가 ― 이 이름은 그녀의 의식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 떠나자 누군가가 자기 내면의 가장 어두운 밀실을 다이너마이트로 부서뜨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스스로는 존재하자는지조차 몰랐던 밀실로 가는 길을 누군가가 쓱 훑어보더니 바로 발견해 낸 것이다. 피츠조지 씨는 지극히 뻔뻔한 짓을 저질렀다. 그녀의 영혼을 들여다봤던 것이다.(162~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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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피츠조지 씨!" 레이디 슬레인이 외쳤다. "절대 제 삶이 비극이었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돼요. 저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갈망하는 걸 전부 누리며 살았어아. 지위, 안락한 생활, 자식들, 사랑하는 남편. 불평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도!"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하셔야 했지요. 예술가에게 자기 재능을 실현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어요. 저보다 잘 아시잖습니까. 그러지 못하면 예술가는 기형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이하게 뒤틀린 나무처럼. 삶의 의미를 전부 잃어버린 채 그저 하루하루 대충대충 흘려보낼 뿐이지요. 진실을 직시하십시오, 레이디 슬레인. 자식, 남편, 부와 명예, 당신이 누린 모든 것들은 단지 자기 자신으로 사는 데 방해가 되었을 뿐입니다. 당신의 소명을 포기하고 그 대체품으로서 선택한 것들이지요. 아마 너무 어려서 잘 모른 채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선택했을 때 이미 진실 앞에서 죄를 저지른 것이었죠."(166~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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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는 세상을 비웃었고, 자기만의 비밀스럽고 사적인 삶을 살았으며, 내면에서 즐거움을 찾았고, 아무한테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껏 케이는 그가 화내는 모습을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웬 신문에서 런던의 괴짜들에 관한 기사를 냈을 때였다. "세상에!" 그가 말했다. "사생활을 지키며 산다고 괴짜라니?" 그는 자기 이름이 포함되었음을 발견하고 분노했다. 사람들이 흔히 타인에게 표하는 호기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천박하고 지루하고 불필요하다고 여겼다. 피츠는 사람들이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기를 바랄 뿐 세상사에 전연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가 선택한 세상에 침잠해서 자신의 소장품과 그것들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살고 싶어 했다. 그것이 그만의 종교였고 사색이었다. 그러니 그의 외로운 죽음을 동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죽음은 그가 선택한 삶과 완전히 부합했으니까.(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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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찢어 놓은 너덜너덜한 자상, 그리고 상상이 남긴 깊지만 보이지 않는 멍 중에 어떤 것이 더 치명적일까?(2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