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황정은, 《연년세세》, 창비, 2020.

시월의숲 2025. 2. 1. 16:32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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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덮고 자지 않은 이불 냄새를 한영진은 좋아했다. 그 냄새는 뭐랄까, 단일했다. 알이라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세상에 나타난 큰 새, 먹지도 자지도 않고 딱 십분 동안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새, 세상에 그런 게 있다면 그 새의 날기깃 냄새가 이럴 것 같았다. 한번이라도 사람이 덮고 잔 이불의 냄새는 이렇지 않았다.(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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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기.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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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이미 떨어져 더러워진 것들 중에 그래도 먹을 만한 걸 골라 오물을 털어내고 입에 넣는 일, 어쨌든 그것 가운데 그래도 각자가 보기에 좀 나아 보이는 것을 먹는 일, 그게 어른의 일인지도 모르겠어. 그건 말하자면, 잊는 것일까.(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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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걸 나쁘다고 말하고 싶을 뿐인데 애를 써야 하고, 애쓸수록 형편없이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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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1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