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이 두 가지 특성이 몸에 밴 채료는 성공한 턱이 없다, 아니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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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흐트는 매우 하얀 얼굴과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졌다. 그들은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영혼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 같다.(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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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소연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하소연을 듣고 나면 상대방을 보다 주의 깊게 바라보게 되며, 그에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동정심을 갖게 된다.(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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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잃는다는 것, 그것에도 향기와 힘이 있다.(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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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류의 솔직함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지루하게 만들 뿐이다.(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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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차라리 내게는 나를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어야 했다. 유감스럽다. 나는 사랑받고 싶지도 않고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싶지도 않다. 그들은 아들자식이 더이상 없다는 것에 익숙해져야만 한다.(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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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때와 장소에 맞는 행동을 할 줄 안다면 그는 신사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이 드는 사람은 누구나 존경하게 되는 법이다.(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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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성난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나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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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화나게 하고, 나에 대한 좋지 않은 견해들을 잔뜩 갖게 했다는 것을 끔찍하게 의식하며 죽음을 맞는 일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여겨진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반항 속에서 아름다움의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자라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겁 없이 저지르는 행동, 어리석은 짓거리 때문에 비참하게 죽는 것. 이것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니다, 분명코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결국 천박하기 그지없는 어리석은 짓거리에 불과하지 않은가.(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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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터놓고 말해보자. 방탕함이 저지르는 일을 황홀경이 용서하는 그런 장소에 가서 사랑과 아름다움을 느낄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악한이 아닐까?(30~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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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일어나야 할 시간보다 조금 더 오래 누워 있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무언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은 때로 너무나 유혹적이다. 그래서 그것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된다. 구속은 불법적인 행동을 하고 싶도록 만든다. 그래서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종류의 구속을 사랑한다.(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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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사람들이 내게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고, 지식과 재치로 번쩍거리고, 자신을 과시해대는 인간들을 나는 증오한다. 영리하고 약아빠진 인간들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공포다.(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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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리도 내려고 하지 않는 그 무언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흥미롭다. 나는 감각을 곤두세운다. 그리고 그것이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아무것도 살필 필요가 없다면 그런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다.(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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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보시다시피 오늘날 종교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 잠이 당신의 그 종교보다 더 종교적이지요. 인간은 잠잘 때 신에 가장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는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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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하나씩 이해해나간다. 그리고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게 되면 그땐 그것이, 말하자면 우리를 소유하게 된다.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겉보기에는 우리가 우리 것으로 만들었던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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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세상에는 소위 발전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지. 하지만 그건 좀 더 뻔뻔하게, 그리고 가차 없이 대중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장사꾼들이 퍼뜨리는 무수한 거짓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야. 대중, 그것은 현대판 노예다. 그리고 개인은 그 굉장한 집단사고의 노예지. 이제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라고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름다움과 선함과 정의로움은 꿈에서나 찾아야 해. 말해봐라, 꿈꾼다는 게 뭔지 알고 있냐?"(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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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어떤 것도 희망해서는 안 돼. 위에 있는 것을 쳐다보아라. 그래야 하고말고. 그게 너에게 어울리니 말이다. 너는 젊다, 기막히게 젊어, 야콥. 하지만 네가 경외감에 가득 차 우러러보는 그 대상을 실은 네가 경멸하고 있음을 항상 너 자신에게 솔직히 털어놓아라.(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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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생각들을 전한다. 그래서 나는 때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다. 그렇게 눈을 감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울 수 있음을 갑작스럽게 느끼게 된다.(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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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약 부자라면, 절대로 세계여행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여행이 나쁠 건 없다. 하지만 낯선 것을 피상적으로 알게 되는 일에 나는 어떤 매력도 못 느낀다. 사람들이 말하는 지속적인 자기 계발이란 것을 나는 대체로 거부할 것이다. 저 멀고 광활한 미지의 나라보다는 심연, 영혼 같은 것이 내게는 오히려 더 유혹적이다. 가까이 있는 것을 연구하는 일은 틀림없이 나를 매혹시킬 것이다.(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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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이란 것은 신경쇠약과 천박한 세계관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기 때문이다. 성공한 것과 인정받는 것을 보여주려는 사람들은 금세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은 자기만족에 가득 차 뚱뚱해진다. 허영의 힘이 그들을 풍선처럼 부풀린다. 두 번 다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신이 선량한 사람을 대중의 인정으로부터 지켜주시기를.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을 나쁘게 만들지는 않지만, 정신적으로 혼란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든다.(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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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다린다. 말하자면 저 인생의 소리에, 사람들이 세계라고 일컫는 저곳에, 폭풍우 몰아치는 저 바다에 귀 기울인다.(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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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고, 단순하게 그리고 쾌활하게 살고 싶다. 생각이라는 것은 집어치우자.(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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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차가우면서도 아름답다. 다만 자유와 사랑에 빠지지만은 마라. 그건 너에게 슬픔만 안겨줄거야. 왜냐하면 자유의 영역에서는 누구나 잠시 동안만 머무를 뿐, 그 이상 오래 머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어. 봐라, 우리가 떠다닌 저 멋진 길이 서서히 녹고 있는 것을. 이제 눈을 뜨면 자유가 소멸해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야. 앞으로도 가슴을 조이는 이런 광경에 자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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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두 배로 하라는 것을 뜻한다.(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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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으로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을 때, 타들어가는 화약을 모두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때, 그때 나는 비로소 웃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가장 웃음다운 웃음을 웃는 것이며 나를 뒤흔든다는 것의 완전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나는 규정이라는 것이 우리의 존재를 은빛으로, 심지어 금빛으로 빛나게 한다는 것을, 한마디로 말해 매혹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또 확고한 신념으로 간직하지 않을 수 없다. 거의 모든 일들이, 거의 모든 욕망들이 바로 금지되었기에 매혹적인 웃음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울어서는 안 된다는 상황, 그것이 사람을 더 울게 만든다.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난 열 배로 사랑한다. 금지된 모든 것은 수백 배의 증폭된 방식으로 살아간다. 죽어야 하는 것은 보다 활기차게 살아가는 법이다.(117~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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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부심을, 명예의 종류를 바꾸어버렸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토록 다른 인간이 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것이 변종인가?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그렇지만,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종(種)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일이다. 나는 아마 인생의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사라진 사람으로, 진실되고 자부심이 더 강한 군텐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족보나 고집하면서 집 안에 박혀 타락해가고, 메말라가고, 관절이 굳어가면서 살기보다는. 뭐 그러려면 그러라지. 나는 선택했다. 그 선택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내 속에는 인생을 그 바닥까지 알고자 하는 별난 에너지가, 모든 사람과 사물들이 내게 본모습을 드러내도록 건드리고 싶은 억누를 수 없는 욕구가 살고 있다.(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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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끔찍스럽게도 다 똑같아 보인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얼굴을 가졌다. 얼굴이 다 똑같이 생긴 것은 아니다, 아니 그렇기도 하다. 그들 모두 쉽사리 퇴색하는 친절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인 것 같다. 그들은 사람과 사물들을 성급하게 함부로 다룬다. 그러고는 다시금 마찬가지 주의력을 요하는 듯 보이는 새로운 일을 처리해버리는 데 전념한다. 그들은, 이 훌륭한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경멸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모든 것을 경멸할지 모른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그들은 갑자기 경솔한 일을 저지르게 될까 두려워한다. 그들은 세상에서 부딪쳐가야 할 고통 때문에 친절하고, 불안 때문에 상냥하다.(127~128쪽)
*
세상에서, 세상 밖에서 비로소, 일을 하거나 무언가를 위해 노력할 때, 무엇인가를 쟁취할 때, 그때, 그때 지루함의 바다가, 적막과 고독의 바다가 네게 그 깊은 심연을 드러낼 거다.(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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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인생에서 의미 있는 것을 기대해야만 하는 거지? 꼭 그래야만 하나? 나는 그저 미미하기 짝이 없는 존재일 뿐이다. 내가 작디작은,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것을, 그것을 난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고집한다.(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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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존중할 만한 어떤 것도, 그리고 볼 만한 어떤 것도 없으니 난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작게 존재하고 작게 머무는 것. 그 어떤 손이, 상황이, 어떤 물결이 나를 높이 들어 힘과 권력이 지배하는 곳으로 데려간다면, 난 나에게 특권을 주는 이 상황을 깨부숴버릴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을 저 밑, 아무 말 없는 어둠 속으로 던져버릴 것이다. 난 오직 저 밑의 영역에서만 숨을 쉴 수 있다.(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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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 되는 그에 관한 기록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정신병원에 안착하여 세상과 이별하기 전까지 어느 곳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돈 유목민이었다는 것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의 학력―현재 우리나라에서 중학교 졸업 정도에 해당함―은 독일 문학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낮은 것이다. 그가 어느 장소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았듯이, 그는 온갖 직업―은행직원에서 하인, 도서관 사서 혹은 비서 등―을 전전하였고 어느 누구와도 깊은 인연을 맺지 않았다. 그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한 것은 (글)쓰기와 걷기였다.(187쪽,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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