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은 '노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대학 나온 사람이 '몸을 쓰는 노동'을 직업으로 삼는 것은 남부끄러운 일이며 인생의 실패라고 여기죠. 대체로 노동을 힘든 육체노동으로 이해하는데, 노동에 그런 것만 있는 건 아니랍니다. 사무직, 전문직, 판매직, 서비스직, 단순 노무직 등 노동의 방법은 다르더라도 모두 노동이거든요.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해 육체적 또는 정신적 노동력을 들이는 행위가 노동이랍니다.(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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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탄생은 두 개의 바퀴로 추동됐습니다. 첫째 바퀴는 생산 수단의 박탈과 노동의 상품화였고, 둘째 바퀴는 학교 교육과 근대적 시간관의 주입이었습니다. 첫째 조건이 경제적 조건이라면 둘째 조건은 제도적 조건입니다. 첫째 조건과 둘째 조건이 맞물려 오늘날의 노동자를 만들었답니다.(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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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노조는 아주 고약한 작명입니다. 임금이 높더라도 노동자가 귀족일 수 없죠. 봉건 시대 먹이 사슬의 꼭대기에 있었던 귀족과 근대 이후 최하층을 이루었던 노동자가 어떻게 동격일 수 있을까요? 귀족 노조는 없습니다.(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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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처럼 월급 많이 주는 직장은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파업을 할 필요가 없을까요? 보수나 대우가 좋다고, 노동조합이 필요 없는 건 아니랍니다. 임금이 높다고 노동자의 권리가 부정될 순 없어요. 또, 급여를 많이 준다고 자본이 인간적인 것도 아닙니다. 자본의 본질은 이윤 추구랍니다.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언제든 노동자를 희생시킬 수 있습니다.(85~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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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가 자기 밥그릇만 챙기며 데모만 한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일터에서 산업 재해로 백혈병에 걸렸는데 회사가 수수방관한다면, 누가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 줄까요?(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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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파업!" 우리는 파업, 하면 으레 불법을 떠올립니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말이죠. 앞서 지적했듯이 노조, 하면 '강성 노조', '귀족 노조'를 떠올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파업은 무조건 불법일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청소년이 있다면 사회의식이 매우 뛰어나다고 보면 됩니다. 대부분의 파업을 불법으로 볼 게 아니라, 일부 파업은 불법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파업은 합법이라고 보는 게 맞죠. 헌법이 파업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으니까요. 노동 조건에 관한 협상이 결렬되면 단체 행동권에 따라 파업할 수 있죠. 이는 분명히 헌법에 명시된 노동자의 권리랍니다.(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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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권리에 대해 판사를 비롯한 법조인들의 의식 자체가 낮습니다. 상위법인 헌법이 단체 행동권을 보장하는데도, 하위법인 형법에 따라 파업에 '업무 방해죄'를 적용하거든요. 판사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업 중심 마인드'를 갖고 있죠. 쉽게 말해 기업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 근로 기준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의지도 별로 없답니다.(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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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이 없는 나라를 알려 달라. 그러면 자유가 없는 나라를 보여 주겠다." 미국 노동 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새뮤얼 곰퍼스가 한 말입니다. 파업의 권리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라면 어디든 보장하는 기본권이랍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파업은 죄가 아닙니다.(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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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를 위한 제도가 사회 정의에 가장 가깝다"라는 철학자 존 롤스의 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근로 기준법은 노동자의 존엄을 지키는 마지노선입니다.(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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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오래 일하는 것은 성실의 증표처럼 여겨졌고, '칼퇴'는 불성실로 인식돼 왔죠. 무언가 이상하지 않나요? 사실 정시 퇴근이 정상적 상황이고, 연장 노동이 예외적 상황이죠. 그런데 지극히 정상적인 정시 퇴근에 '칼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업무 시간이 끝나서 칼같이 퇴근하는 것은 특별하거나 이상한 일도, 더 나아가 비난받을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비정상적 상황을 정상으로 여겨 온 탓이겠죠.(121~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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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진보는 끈질긴 투쟁과 요구로 얻어졌습니다. 노동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 운동사는 노동 조건의 개선, 특히 노동 시간 단축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보다 더 적은 노동 시간을 확보하려면 싸워야 합니다. 이때의 싸움이 누군가를 때리고 무언가를 때려 부수는 일이 아니란 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끊임없이 요구하고 설득하며, 때로는 파업을 통해 요구를 관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싸우는 자는 질 수도 있지만, 싸움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진 것이다."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한 말을 기억하기 바랍니다.(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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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소상공인들의 어려움은 이해되지만, 그들의 열악함을 덜어 주려고 더 열악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게 온당할까요? 앞서도 지적한 것처럼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근로 기준법의 보호를 온전히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보호받는 것 중 하나가 최저 임금인데, 그마저 무력화한다면 그들은 정말로 '을 중의 을'로 전락하게 될 겁니다. 영세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들의 어려움을 더 어려운 이들에게 떠넘겨선 안 되죠.(172~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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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소유자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보상을 받는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한 말입니다. 가진 자의 여유는 없는 자들의 노동과 희생을 먹고 자라는 것이지요.(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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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청소년들을 호칭할 때에는 알바생이 아니라 알바 노동자라고 불러야 합니다. 알바생처럼 일하는 '학생'에 초점을 맞추면 공부가 중요시되기 때문에 노동이 등한시되기 십상입니다. 우리 머릿속에서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학생('일하는 학생')이 아니라 노동자('학생 노동자'나 '공부하는 노동자')에 강조점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자는 노동자인데 학교를 다니는 노동자라는 거죠. 그래야만 노동자로서 제대로 인정받고 권리도 보장받지 않을까요?(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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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대부분 노동자의 자식이고, 앞으로 노동자가 될 것입니다. 훗날 여러분의 자식도 노동자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죠. 그럼에도 우리는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무지합니다. 기업 중심의 반(反) 노동자 의식을 내면화하고 있죠. 불법 파업, 과격 노조, 귀족 노조···. 학교도 그렇게 가르치고 언론도 그렇게 떠드니까요. 다들 기업의 편에 서 있죠. 여기에는 기업 중심의 교육도 한몫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가 노동자 의식보다 소비자 의식에 젖어 있는 것도 크게 작용합니다.(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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