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시간의 목소리》, 후마니타스, 2011.

시월의숲 2026. 3. 26. 21:03

우리는 시간으로 빚어졌다.
우리는 시간의 발이며 시간의 입이다.
시간의 발은 우리의 발로 걷는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조만간 시간의 바람이 흔적들을 지울 것이다.(13쪽, '시간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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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와 다른 물고기들은 외과 수술 없이도 성을 전환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누워서 떡을 먹듯이 쉽게 암컷은 수컷이 되고 수컷은 암컷으로 변한다. 누구도 자연 혹은 신의 법칙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비난받지도 또 조롱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27쪽,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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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쥐들에게서 우리는 터널 뚫는 법을 배웠다.
비버들에게서 우리는 제방 쌓는 법을 배웠다.
새들에게서 우리는 집을 짓는 법을 배웠다.
거미들에게서 우리는 천 짜는 법을 배웠다.
아래로 구르는 나무 몸통들에게서 바퀴를 배웠다.
물 위에 떠서 표류하는 나무 몸통들에게서 배를 배웠다.
바람에게서 범선을 배웠다.
누가 우리에게 악행을 가르쳤을까? 누구에게서 이웃을 괴롭히고 세상을 굴복시키는 법을 배웠을까?(129쪽, '첫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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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말은 그 말이 지칭하는 사물을 모욕하지만, 참말은 그 영혼을 드러낸다. 그들은 영혼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들 속에 산다고 믿는다. 만일 내가 나의 말을 건네면 나 자신을 건네는 것이다. 언어는 쓰레기통이 아니다.(133쪽,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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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예요." 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바로 이거였어요.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얘기가 바로 이거라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134쪽,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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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산타야가, 마음이 커서 보이지 않는 것도 본다고들 하는데 그게 사실인지 그에게 아주 공손하게 물었다. 사람들 말로는, 마음이 바다처럼 넓은 나머지 두개골에 들어가지 않아 그가 두통을 앓는다고 했다.
가우초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너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은 내가 호기심이 많고 운이 좋다는 거란다. 시력이 떨어질수록 더 많은 게 보이거든."(158쪽,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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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눈에는 어떤 색깔들이 보이는지 알고 싶어요."
"너랑 똑같지." 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제 눈에 어떤 색깔들이 보이는지 어떻게 아세요?"(159쪽,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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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장에서 주운 망가진 인형들은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인형들은 악령들로부터 그를 보호했다. 깡마른 개 네 마리는 사악한 사람들로부터 그를 지켜 주었다. 그러나 인형도 개들도 인어는 쫓아버릴 줄 몰랐다.(184쪽, '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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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과 손짓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먼발치에서조차 비행기를 본 적이 없는 마리아 델 카르멘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 그래요, 이제 알았어요. 바람 속에서 잠든 채 여행할 거라고 말하고 싶으신 게로군요."(202쪽, '비행에 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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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곳들과 마찬가지로 그곳도 그가 지나가다가 들른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도착하기 무섭게 떠날 생각을 했다. 그는 백 개국을 돌아다니며 이백 개의 해시계를 만들었고, 정이 들면 떠났다. 어느 침대나 집에 뿌리를 내리게 될 위험으로부터 달아났던 것이다. 
그는 새벽 시간을 택해 떠나길 좋아했다. 태양이 떠오르고 있을 때 떠났다.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의 문이 열리자마자, 돈 펠릭스는 그동안 모아 두었던 푼돈을 창구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돈이 되는 데까지 주시구려."(215쪽, '태양을 따라 걷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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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청하지 않을게요. 다만 기적이 있는 곳에 저를 놓아 주세요."(223쪽,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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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은 무덤에 두고 다른 한 발은 춤추면서 아직 이렇게 걷고 있다네."(229쪽,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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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었던 게 수 세기 전인지, 조금 전인지, 아니면 결코 일어난 적이 없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나무꾼이 일하러 갔다가 도끼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웃 사람을 관찰했고, 얼굴이나 몸짓, 말투 등에서 그가 전형적인 도끼 도둑의 면모를 지녔다는 것을 확인했다.
며칠 뒤에 나무꾼은 구석 자리에 떨어져 있는 도끼를 발견했다.
이웃 사람을 다시 관찰했을 때, 그는 얼굴도, 몸짓도, 말투도 도끼 도둑이라고 할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242쪽, '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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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더 버틸 수 없었다. "삶을 잃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317쪽,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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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된 비행기가 뉴욕 트윈타워의 두 번째 빌딩을 강타한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일이다.
타워가 삐걱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곧장 밑으로 대피하려고 층계로 몰려갔다.
아비규환의 상태에서 갑자기 확성기가 울려 퍼졌다.
확성기는 직원들에게 사무실로 복귀하라고 지시했다.
지시에 따르지 않은 사람들은 목숨을 구했다.(343쪽,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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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아침을 알리는 걸까? 아니면 노래하며 아침을 만드는 걸까?(353쪽, '날들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