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연못이 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시월의숲 2021. 7. 17. 12:24

"저기요, 아저씨. 센트럴 파크 남쪽에 오리가 있는 연못 아시죠? 왜 조그만 연못 있잖아요. 그 연못이 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좀 엉뚱하기는 하지만 아시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 사람이 알고 있을 가능성은 백만 분의 일의 확률이었다.

기사는 고개를 돌리더니 날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요? 날 놀리는 건가?"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좀 그런 일에 흥미가 있어서요."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입을 다물었다.(85쪽, J. 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2001.)

 

 

*

몇 년 전에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아무런 말도 쓸 수 없었다. 재밌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무런 말도 쓸 수 없었는지 모르겠다. 보통 나는 책을 읽고 나면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록하고는 했으나, 유독 그렇지 못한 책들도 있다.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그런 책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줄거리가 점차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갈 때쯤 다시 이 책을 읽을 기회가 왔다. 어쩌면 두 번 읽으라는 계시였는지(이런 말 좋아하지는 않지만) 모르겠다. 세상에는 한 번만 읽어서는 무언가를 쓸 생각이 나지 않는 책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두 번째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나서는 마치 이 책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 그렇구나, 그래 그런 거였어, 하면서. 이 책을 읽고 우선 떠오른 장면은 바로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집을 떠날 결심을 한 후 뉴욕으로 와서 택시 기사와 나눈 대화였다. 나는 그 대화가 무척 상징적이라고 느꼈는데, 말하자면 주인공이 바라보는 세상과 세상이 주인공을 대하는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궁금한 건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센트럴 파크 남쪽에 있는 연못이 얼면 오리들은 다 어디로 가는가, 라는 물음. 하지만 그가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면 상대방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뭐 하는 거요? 날 놀리는 건가?" 매번 이런 식이다. 학교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들도, 그가 호감을 가졌던 여자 친구들도, 심지어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선생님도 모두. 그가 부딪히는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그저 타인일 뿐, 대화는 이어지지 못하고, 서로에게 스며들지 못하며, 물과 기름처럼 겉돌기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관심 있는 것들과 그들이 관심있는 것들은 극과 극만큼이나 달랐던 것이다. 

 

그는 말한다. "시합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시합은 무슨. 만약 잘난 놈들 측에 끼어 있게 된다면 그때는 시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측에 끼게 된다면, 잘난 놈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편에 서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시합이 되겠는가? 아니, 그런 시합은 있을 수 없다.(19쪽)", "훌륭하다니. 난 정말로 그런 말이 듣기 싫었다. 그건 위선적인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20쪽)",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전혀 반갑지 않은 사람에게 늘 <만나서 반갑습니다> 같은 인사말을 해야 한다는 건 말이다.(120~121쪽)", "실제로 해보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하게 될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278쪽)"

 

그는 지금 세상과 열심히 부딪치는 중이다. <데미안>의 저 유명한 문구처럼, 알에서 나오기 위해,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고 새롭게 태어나려고 하는 중인 것이다. 그리고 <데미안> 속 또 다른 문장. '나는 내부에서 스스로 나오려는 것대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왜 그다지도 어려웠던가?' 이 문장이 어쩌면 홀든의 심정을 그 무엇보다도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의 불만에 찬 외침은, 한 미성숙한 인간의 어리석고 치기 어린 외침이 아니라, 세상의 모순을 스스로 직시하고 있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외침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한 인간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투명하고 여린 영혼을 가진 한 인간의,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쓴 투쟁기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느끼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모순과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고 한 이유는 바로 그의 유일한 혈육인 동생을 대하는 그의 태도 때문이다. 결국 동생 때문에 그는 집을 떠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으니까. 또한 그가 정말로 되고 싶었던 것이 결국은 호밀밭의 파수꾼 아니었던가? 호밀밭에서 놀던 아이들이 절벽에서 떨어질 거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 주는 일.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건, 결국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어떤 슬픔이 조금씩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주인공 홀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이란 결국 고독한 존재라는 걸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모순으로 가득하고, 그런 인간이 모인 세상이라는 건 당연하게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부조리한 것들로 가득하다는 걸, 이미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미처 알지 못한다. 단지 희미하게 감지할 뿐이다. 그는 아픔의 원인도 모른 채 아프다. 그의 마지막 고백은 그래서 좀 아련하게 다가온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이야기에서 언급했던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것뿐. 이를테면, 스트라드레이터나 애클리 같은 녀석들까지도. 모리스 자식도 그립다. 정말 웃긴 일이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2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