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시작의 다른 이름

시월의숲 2006. 2. 20. 13:27

 

졸업을 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늘, 졸업장을 찾으러 간 학교에서 그만 마음이 심란해지고 말았다. 뭐, 이건 불가항력적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날씨는 따뜻했다. 학교 곳곳에 학사모와 졸업가운을 입은 학생들이 자신의 부모 혹은 친구들과 모여 즐거운 표정으로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는 듯 보였다. 색색의 꽃다발과 터져나오는 웃음과 찰칵하는 소리와 졸업식 특유의 들뜬 분위기. 그 속에서 나는 물과 섞이지 못하고 떠도는 기름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붕붕붕....

 

부모님은 오지 않았다. 그나마 친하다고 생각되는 몇 안되는 내 동기들은 전부 휴학을 해서, 더욱 나 혼자만 졸업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졸업식이라고 축하해주기 위해 온 친구들이었지만 오히려 자신들이 더욱 심란해 했다. 모두들 닥쳐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리라. 나또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막막함에 때론 숨이 막힐 지경이니.

 

그래도 오랜 시간 동안의 내 대학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날인데, 시무룩해 있으면 안되겠다 싶어서 억지로라도 웃어보려 했는데 그게 잘 안되었다. 역시, 난 얼굴에 기분이 그대로 드러나는게 흠이다. 슬플 때 웃을 줄도 알고 기쁠 때 내색하지 않을 줄도 알아야 할터인데. 그래야 다치지 않고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터인데.

 

어쨌거나 친구의 디카로 사진을 몇장 찍고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사진 속 내 얼굴은 얼마나 못나 보일까. 나는 무엇 때문에 이리도 패배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자학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졸업하기 때문에?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돈 때문에? 양복 한 벌이 없기 때문에? 앨범사진을 찍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면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인간과 다를바가 없지 않은가! 내가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던 말들을 나 스스로 내뱉고 있다니! 나약한 인간!

 

그래. 이번 한 번이다. 더이상 이런 말들은 하지 않으리라. 감상에서 벗어나 이성에 다가가리라. 차가운 머리가 되리라. 졸업은 세상의 끝이 아니다. 내 인생의 끝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시작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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