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파트릭 모디아노, 『슬픈 빌라』

시월의숲 2007. 5. 25. 13:27

우리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울수 있을까. 그 기억이 전쟁과 같은 비극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혹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에 관한 것이거나,  흔하디 흔한 연인과의 헤어짐에 관한 것이거나 간에.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과거를 통과해서 지금에 이르렀고, 그러한 과거가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하는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가 지나온 날들을 기억하거나 혹은 추억한다. 그것은 때로 한 인간의 온 삶을 지배하며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지속적으로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슬픈 빌라>의 주인공도 과거를 추억하며 예전에 자신이 만났고 사랑했던 이본느와 그의 동료인 맹트를 추억한다. 약간의 강박증을 가진, 스스로 무국적자라 칭하며 정처없이 떠도는 주인공 빅토르 슈마라(이것도 가명이다)는 과거에 자신이 이본느를 만났던 호텔(지금은 사라지고 없는)에 가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현재 이본느의 동료였던 맹트가 가스자살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를 보게 된다.

 

그들은 모두 삶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서로에 대해 묻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그들이 그런 존재들이 된 것에 대해 작가는 전후라는 시대적 배경을 깔아놓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도 그것은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아니 굳이 젊은이들이라고 국한할 필요도 없을, 인간 본연의 정체성에 관한 끊질긴 물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떠나간 연인에 대한 아련하고 아쉬운 감정만이 아닌... 그 때의 나는 진정 나였는가? 나는 어떻게 해서 그곳에 있게 되었으며 내가 만났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끊임없이 자신의 추억을 더듬으며 한때 만났었던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이 만났던 호텔과 거리, 술집의 이름들을 떠올리려 한다. 나는 그 모습에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일종의 슬픔을 동반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떠나가버린 연인에 대한 아쉬움과 점차 잊혀져가는 사물들에 대한 안타까움들... 세월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는 것일까. 슬픔? 그것이 단지 슬픔일 뿐이라면 인간은 왜 그리도 과거를 추억하려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는 쓰는 것일까. 기쁜 순간을 찍은 사진이라 해도 지나고 나면 오로지 슬픔과 한숨과 안타까움과 후회만이 남는다면...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더욱 슬프기 때문에? 슬프지만 그것이 지금의 '나'란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것은 그 순간이 행복하기 때문이리라. 그 순간에는 오로지 그 순간만 있는 것이므로. 그것이 미래에 어떤 빛깔과 향기로 남겨질 것인지, 그 순간에는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두 그들처럼 <슬픈 빌라>에서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우리는 만났고, 헤어졌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같이 웃기도 했고, 슬퍼하기도 했으며 때론 소설의 주인공처럼 울리강컵 대회에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호텔과 거리와 건물들은 모두 파괴되거나 모습이 바뀌었을지 모르나,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몇 개의 기억들을 끼워맞추며 그 시절을 떠올린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은 파편이 되어 우리들의 머릿속에 몇 조각 박힌다. 그리고 그렇게 박힌 기억의 편린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모디아노는 그러한 기억의 편린을 건져내어 아름답고 슬프게 직조할 줄 아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작가임에 틀림없다. 언젠가 그런 기억들조차 희미해질 때,  아마도 우리가 가진 슬픔 또한 희미해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