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본다는 말이 있다. 이는 다른 말로 자신이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라면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이 말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조금씩 눈이 멀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돈에 눈 멀고, 탐욕과 권력에, 이기심과 질투, 증오에 눈먼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라면, 실제로 눈이 먼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을까? 물론 이것은 은유이다. 이 소설은 단 한 명만 제외하고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 세상을 그려보임으로써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란 바로 우리들 모두를 가리킨다.
햐얀 실명이라 불리는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이 격리되고 그 사람들과 접촉한 사람들이 모두 실명이 되어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그것은 치명적 바이러스처럼 사람들에게로 퍼져나가 급기야는 모든 도시가 실명한 사람들로 가득차게 되어버린다. 차가 멈추고, 물이 끊기고, 전기가 나가고... 모든 문명의 이기들은 사람들의 눈이 멀지 않았을 때에만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온통 하얗게 보이는 실명의 세상 속에서,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식욕과, 성욕, 등 모든 동물들에게 공통적으로 부여된 생리적인 욕구일 뿐이었다. 깨끗하던 사람들의 거리는 순식간에 배설물들과 쓰레기로 들끓었고, 먹을 것 때문에 살인을 하고, 강간을 했다. 그래, 그곳은 바로 지옥(그런게 있다면)이었다. 순식간에 그 모든 것들이 지옥으로 변해버리는 광경이라니!
작가는 그런 세상을 오직 한 사람만이 시력을 잃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지켜보게 만든다. 안과의사의 아내. 그녀가 눈이 멀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었을까? 그녀가 본 것은 인간이란 결국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 전에 원초적인 욕구를 지닌 동물과 하등 다를바 없다는 사실의 확인이 아니었던가! 인간의 관점으로 봤을 때 추악하고 잔인하기 그지없는. 하지만 그러한 확인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닥에 발이 닿았을 때에만 우리는 뛰어 오를지, 그 자리에 주저 않을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라도 그것을 깨닫게 해주기 전까지는 결코 그것에 대해 생각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작가는 희망의 빛을 감추지 않는다. 미미하지만,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빛. 의사의 아내와 그녀를 따르던 몇 명의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바로 사람들과의 연대이다.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려는 사람들에게, 그들 옆에 다른 사람들도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 진정으로,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작가가 그려보이고 싶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그러한 휴머니즘은 소설 속 눈먼 자들의 도시가 너무도 끔찍하고 추악하였기에 더욱 강렬하고 선명한 메시지로 다가왔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라는 주문은 아직 우리에게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선 내 주위의 보이는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따뜻한 관계를 맺어 나가다 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도 볼 수 있는 눈을, 언젠가는 반드시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자면 우선 인간의 이성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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