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장정일, 《생각》중에서

시월의숲 2007. 7. 26. 12:05

용기

 

 

"나도 랭보가 될 수 있었는데." 하고 푸념을 한다. "하지만 나는 랭보 같은 용기가 없었다"고 자책한다. 민음사에서 나온 두 권의 시집을 내고 직장을 찾아야 했다. 시작을 끝내는 것과 함께 글쓰기에서 손을 씻어야 했다. 랭보처럼 글을 잘 썼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랭보처럼 글쓰는 일로부터 깨끗이 떠날 수 있었는데도 떠나지 못했다는 푸념과 자책이 오늘까지 나를 괴롭힌다. 물려받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변변한 졸업장도 없다. 배운 기술이라곤 글쓰기 뿐. 그래서 소설을 쓰게 되었고, 절필할 때 하지 못하고 글판에 어기적거리다가 감옥까지 가게 됐다. 하지만 절필하고 말고는 전적으로 용기의 문제라고 해야 한다. 랭보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있었는지 혹은 졸업장이 많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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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탁자가 두 개밖에 없는 포장마차 가운데 한 탁자를 차지하고서 한 선배와 소주를 3분의 2 넘게 마시고 있는데, 왁자지껄 새로운 손님 한 떼가 들어와 앉는다. 세 명은 평범해 보이는데 머리칼을 네모나게 깎아친 나머니 한 놈은, 척 보니 깍두기다. 선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도란도란하고 있는데 남녀 한 쌍이 포장을 들치며 삐죽이 들어왔다가 좌석이 없어서 나간다. 그러자 자기 앞의 술잔을 아가리에 털어 넣은 깍두기가 분명 우리보고 들으라고 씨부렁거린다. "술을 처먹었으면 빨리빨리 일어나야지 다른 사람 장사도 못하게 꾸무적거리고 있어." 딴에는 포장마차의 주인이 제 친구였거나 아니면 나와바리에 속했던 모양이다. 선배도 나도 서로 무안해서 얼굴도 못 쳐다보고 탁자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깍두기는 기고만장했다. "술도 못하는 새끼들이 안주하나 시켜 놓고 시간만 겐세이하고 있네." 이런 개자식이 있나. 욕을 하려면 인지가 되도록 상대를 콕 찍어 해야지, 너 말고는 들어 줄 사람이 없는 곳에서 누구 들으라고 히야까시를 하나. 고개를 들어 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야 씹새끼야, 너 깡패지." 불의의 기습을 당한 깍두기가 혀를 차며 앉은 자리를 기신기신 일어난다. 그러면서 일행을 향해 "나보고 깡패란다. 이때껏 살았어도 깡패라는 말 처음 들어본다." 정체성이란 뭔가?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것처럼 스스로 깨닫기까지는, 타인의 부름에 의해 규정되는 게 정체성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자신이 선생인줄 아는 까닭은 제자들이 나를 볼 때마다 "선생님, 선생님"하고 불러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깡패에겐 아무도 "깡패님, 깡패님"하고 불러 주지 않는다. 그래서 깡패는 뒈질 때까지 자신이 깡패인 줄 모른다. 그러니 얼마나 놀랐을 것인가. 갑자기 똥인지 된장인지 몰랐던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었으니. 깍두기는 마이를 벗었다. 그리고 술병 박스에 든 빈 소주병을 들었다. 나는 의자에서 몸을 틀어 아예 놈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1미터 지척에서 병이 날아왔다. 나는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그 병은 내 귓전을 스쳐 지난 다음 바닥에서 깨어졌다. 두 번째 빈 병을 드는 것을 놈의 일행이 막았다. 그들은 참 유순했다. 누가 나를 불러 주기 전에는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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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하나 되는 날

 

첫눈이 내리는 날, 사람들의 상상력은 고갈되어 하나같이 감상적이 되며 까다로운 주당(酒黨)들도 하나의 구호 아래 통합된다. 첫눈이 내린 날, 라디오 방송은 상투성을 면하지 못하고 디스크 자키들의 개성은 하나같이 증발한다. 첫눈이 내렸으니까 아마도의 <눈이 내리네>나 영화 <러브 스토리> 혹은 <닥터 지바고>의 테마송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아, 한껏 감상적이 되어 있는데다가 술까지 마신 채 힘이 쪽 빠져서 우리는 하루 온 종일 그것을 듣게 된다. 그러니 뭐라고 하면 좋을까? 첫눈에는 상상력 대신 보편성을 불러일으키는 마법의 힘이 있다고나 해야 할까? 그 힘으로 글을 쓰면 쓰는 족족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육각형의 비밀을 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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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해석이 있어 왔지만, 나에게 영화란 너무나 명확하게 규정된다. “두 번 본 것만이 영화다. 한 번 보고 만 것은 영화가 아니다, 그건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목격하게 된 교통사고와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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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조지폐

 

통상 작가의 인세는 책값의 10%. 다시 말해 8,900원의 정가가 매겨진 생각이 한 부씩 팔릴 때마다 나는 890원씩을 챙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나는 한국은행의 허락 없이 890원짜리 지폐를 공공연히 제작하고 통용시켰으므로, 가련한 위조지폐범에 불과하다. 아아, 장안의 지가(紙價)를 올린다는 말이 무슨 뜻이드뇨? 감쪽같은 위조에 성공했다는 말이 아니던가? 정말이지 나는 아주 젊었을 때부터 글쓰기가 범죄와 같다고 느낀곤 했는데, 나의 죄목은 위에 적시한 그대로다. 책상 앞에 오랜 시간 동안 웅크리고 앉아 위조폐를 그리는(쓰는) 나와 같은 창백한 범죄자들은 그러나 참 용케도 자신의 죄의식을 무마하거나 극복하며 살아왔다. 이 당당한 위조폐범들은, 한국은행에서 지폐를 찍듯이 만들어 놓은 통상적인 의미나 규범적인 가치가 아닌, 독자적인 의미와 가치를 통용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당당한 위조지폐범들이다. 작가란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화폐질서와, 화폐질서만큼 공고한 체제 의식을 조롱하고 전복하는 위조지폐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