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존재도 이 무량히 퍼붓는 눈송이 중의 하나가 아닐까? 세상의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내가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몰라도 다 함께 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함께 쌓여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더불어 내가 한 송이 눈이 되어 떠돌 때 가슴에 품고 있는 상처나 고통도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어느 따뜻한 봄날이 오면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다. 다시 눈이나 비가 되어 세상을 찾을 때까지. 퍼붓는 눈 속에서 나는 그런 상념에 사로잡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고 때로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기도 했다. 태초의 적막 속에서 들려오는 눈의 소리를 들으며.
- 윤대녕, 《눈의 여행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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