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김중혁, 《펭귄뉴스》중에서

시월의숲 2007. 7. 30. 11:20

...살다 보면 기억의 줄기 한가운데 검은 테이프를 붙여놓은 것처럼 깜깜한 시기가 있는데 내게는 그때가 그랬다. 무너져버린 제방을 밟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모든 것이 너무나 빨라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인간의 삶 역시 가속도가 붙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스무 살 무렵은 더디고 더디지만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기 시작하면 도무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는 것이다. 브레이크가 과열된 자동차처럼 언덕 아래로 사정없이 미끄러지다가 쾅, 하고 박살나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속도를 줄이기 위해선 어쨌거나 조금은 가벼워야 할 필요가 있다, 고 나는 생각한다.

 

 

- <무용지물 박물관> 중에서

 

*

 

  "난 여기에서 에스키모를 연구한 다음 많은 걸 깨달았다. 훌륭한 고래가 없듯 훌륭한 사냥꾼도 없고, 훌륭한 선인장이 없듯 훌륭한 인간도 없어. 모든 존재의 목표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훌륭하게 존재할 필요는 없어. 에스키모의 나무 지도를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지도에는 '훌륭한'아라는 수식어가 없구나. 이 지도 속에는 인간이란 존재가 스며 있지 않구나. 그냥 지도이구나..."

 

 

-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 중에서

 

*

 

  "이번엔 느낌이 좋아. 마라톤 보면서 생각난 건데 말야. 난 늘 400미터 이상을 달리려고만 했어. 하지만 이번엔 정확한 목표가 생겼잖아. 그건 엄청나게 다르게 느껴져. 그냥 400미터 이상이 아니고 42킬로미터하고도 195미터를 더 뛰는 거라고. 어쩜 마라톤이란 것도 400미터와 똑같을 거야. 400미터엔 400미터에 알맞은 전력질주가 있듯이 마라톤엔 마라톤에 알맞은 전력질주가 있을 거 아냐. 그걸 찾기만 하면 돼. 빠르거나 느리거나 그런 건 상관없어."

 

 

- <사백 미터 마라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