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피터팬의 공식

시월의숲 2007. 12. 20. 21:18

성장영화를 보는 것은 힘들다. 아니, 처음 그러한 영화 보고자 마음먹는 것조차 나에겐 힘든 일이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내내 고통스러워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 스스로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성장영화를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 같은 경우, 결말이 알고 싶기 때문이다. 새삼스러운 일이다. 성장영화의 결말은 어쩌면 눈에 보이듯이 뻔한 것일 수도 있는데. 번데기가 자연스럽게 나비가 되듯이. 하지만 세상의 여러 변수들은 반드시 번데기가 나비가 되리라고 장담할 수 없게 만들며, 나비라고 해서 다 같은 나비가 아니게 만든다. 나는 어떤 나비가 될 것인가? 아니, 진정 나비가 되어 날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것이 늘 궁금하고 그렇기 때문에 성장영화를 본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번데기의 내적 변화와 그에 따른 고통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마도 그것을 인간이 어른이 되기 위한, 좀 더 성숙해지기 위한 과정에 비유한다면 ‘피터팬의 공식’이라 이름 붙여도 되지 않을까. 피터팬은 어른이 되지 않는 아이인데, 현실에서 피터팬은 어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자의든 타의든, 내적인 심리 변화에 따른 것이든 외적인 압력과 모순에 따른 것이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시간의 흐름 속에 통과의례처럼 치러야 하는 한 시기가 있다. 굳이 그것을 몇 살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보통 십대 후반인 것은 분명하다. 십대에서 이십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그 어정쩡한 시간의 통로. 그 통로에 서 있으면 인간은 유별나게 외로워지고, 예민해지며, 자신의 절망적인 환경에 좌절하게 된다. 사랑이든 무엇이든 그때는 모든 것을 열병처럼 한바탕 앓게 되는 것이다.

 

<피터팬의 공식>에서의 주인공인 열아홉 살의 김한수도 그러한 시기에 서 있다. 그는 수영에 재능이 있지만 어느 순간 그것을 포기하게 되고 그에 맞춰 그의 어머니도 농약을 먹고 자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어머니는 살아났지만 식물인간이 되어버리고 아버지가 없는 그는 홀로 어머니를 수발하게 된다. 그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옆집으로 이사 온 여자 피아노 교사에게 마음이 끌린다. 어쩔 수 있을까! 고등학교 삼학년인 그는 대입에 대한 압박과 식물인간이 된 어머니, 옆집 여자에 대한 호기심과 이끌림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다 카드빚 독촉으로 시달리게 된 그는 급기야 편의점을 털게 된다.

 

불한당 같이 맞닥뜨리게 된 현실이라는 이름의 괴물. 벼락처럼 내리쳐진 그것 앞에 그는 어떡해야 할까. 선택조차 허락되지 않은 삶 앞에 그는 죽음을 선택해야 했을까? 가장 생의 기운이 충만할 때에? 아니다. 사실 죽음도 그리 쉽지만은 않다. 절망적이지만 헤쳐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이기도 하니까. 영화 속에서 그가 한 말이 생각난다. 수영 경기를 출발할 때 수영장에 물이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에 항상 출발이 늦는다고.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물이 다 빠진 수영장을 보고 그는 미소 짓는다. 그는 무언가를 깨닫는다. 그가 왜 미소 지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렴풋이 나는 그가 조금 성장했음을 느낀다. 삶의 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음을 느낀다.

 

영화는 중간 중간에 불을 밝힌 등대를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주인공은 벌거벗은 채 바다를 헤엄쳐 간다. 저 멀리 불을 밝힌 등대를 향해. 영화는 그렇게 상징적인 장면을 보여주면서 끝이 난다. 우리는 결국 따뜻한 자궁에서 헤엄치던 기억에서 벗어나 스스로 거친 바다를 헤엄쳐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피터팬의 공식’이다.

 

보는 동안 고통스러웠지만 보고 난 후 오랫동안 헤아릴 수 없는 어떤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성장통을 겪고 난 후의 알 수 없는 희열과 안도의 침묵 때문에 나는 보기 힘들어 하면서도 성장영화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리라. 다른 어떤 영화보다도 보고 난 후의 울림이 크기 때문에. 영화 <피터팬의 공식>은 그러한 절망과 그러한 울림을 잘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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