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카포티

시월의숲 2007. 6. 9. 12:09

트루먼 카포티. 그는 1950~60년대 활약했던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이지 저널리스트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인 콜드 블러드> 같은 소설을 써서 굉장히 유명해졌으며, 특히 <인 콜드 블러드>라는 소설은 당시 켄자스 주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가족 살인사건의 범인을 작가가 직접 취재하면서 쓴 팩션인데, 미국에서 무려 500만부나 팔렸다고 한다.

 

영화 <카포티>는 주인공인 트루먼 카포티가 <인 콜드 블러드>를 쓰기 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결코 살인범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나 사형의 부당함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인기 소설가인 카포티가 자신의 글을 위해 사형수를 취재하게 되고 그러면서부터 생기는 갈등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 혹은 냉혈한은 바로 살인범이 아니라 카포티 자신이 아닌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살인자들에게(모두 두 명이다) 우호적인 글을 쓰겠다는 거짓말로 안심시킨 다음 그들이 하는 말을 바탕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런데 자신이 소개시켜준 변호사로 인해 그들의 사형이 자꾸 유예가 되면서 그가 쓴 글도 따라서  결말을 맺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것은 그로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고뇌가 시작된다. 그의 글은 결국 그들이 사형을 받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가 지금껏 그들에게 베풀었던 모든 행위들이 결국 위선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그는 갈등한다. 자신의 글을 위해서 그들이 죽어야 하는가? 물론 이것은 잘못된 생각일 수 있다. 그들은 엄연히 일가족을 죽인 살인자이니까. 하지만 주인공인 카포티에게로 초점을 맞춘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는 글을 쓰기 위해 그들을 이용한 것이니까. 그리고 그들이 죽어야만 그의 글이 완성되는 것이니까. 그는 이러한 갈등에 스스로 자신의 영혼이 파괴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물론 영화가 종반으로 치닫을수록 카포티는 살인범에게 인간적으로 끌리게 된다. 그래서 결국 살인범이 교수형을 당할 때 그는 눈물까지 흘린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가 흘린 그 눈물이 순수히 그들의 죽음 때문에 나온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스스로의 후회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생각건대, 아마도 그 두가지 다였을 것이다. 그들이 죽고 <인 콜드 블러드>가 출판된 후 그는 변변한 책도 내지 못한 채 알코올 중독 합병증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하니까. 자신 안에 들어있는 악마성을 깨닫는 것은 그렇듯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얻은 것은 부와 명성이었겠지만 잃은 것은 바로 자신의 양심이 아니었을까? 작가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양심.

 

이 영화를 보고 작가란 직업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만약 내가 카포티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나도 그처럼 행동하고, 갈등하고, 결국엔 눈물까지 흘리지 않았을까. 작가적 욕심은 때론 그 자신의 영혼마저 팔아넘길 정도로 강렬한 유혹이었을 것이므로. 그렇게 쓰여진 그의 소설을 지금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읽는다는 것은, 그가 가진 악마성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긴, 누굴 탓할 수 있을까. 카포티 자신도 그 책이 완성되었을 때, 얼마간이나마 말못할 희열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주인공인 카포티 역할을 맡았던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탓다고 한다. 이전의 영화에서 그는 수염이 덥수룩하고 머리는 아무렇게나 기른, 탕아같은 이미지였는데, 이 영화에선 무척 깔끔하고 지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서 좀 놀랐다. 역시 명배우는 어떤 역할을 맡든 그 배역에 어울리도록 자유자재로 변할 수 있구나 생각했다. 카멜레온처럼. 영화에서 들려준 그의 독특한 발성도 그렇고. 원래 카포티가 그렇게 특이한 목소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아, 그리고 <앵무새 죽이기>를 쓴 하퍼 리도 그의 유년시절부터 친구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영화를 보고나서 책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보통 책이 원작이 되는 경우에는 책을 먼저 읽었었는데, 이 영화는 그 책이 직접적인 원작은 아니니까. 어쨌거나 <인 콜드 블러드>를 읽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이건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분명 악마적인 취미가 아닐 수 없다.

'봄날은간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터팬의 공식  (0) 2007.12.20
기담  (0) 2007.11.17
밀양 (Secret Sunshine)  (0) 2007.05.31
메종 드 히미코  (0) 2007.05.15
고상하고 지적인 살인마 - 한니발  (0) 2007.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