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슬픈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하루종일 그 슬픔이 가시지 않을 때가 있다. 꿈을 꾸면서도 이것이 꿈일거라는 확신이 들지만, 마음대로 깨지 못하고 꿈 속에서 느낀 감정들이 깨고 난 후에도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다. 그것은 진정 꿈이었을까? 꿈 속에서 만난 사람과 그 사람에 의해 느껴지는 아픔, 고통, 슬픔이 그렇듯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여전히 슬픈데.
김기덕 감독의 열다섯 번째 영화인 <비몽>은 그렇듯 깨고 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슬픈 꿈에 관한 영화이다. 앞서 말했던 꿈과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이 꾸는 꿈이 타인에게 전해져 그대로 행동하게 만드는 기이한 꿈, 혹은 현실에 관한 이야기랄까. 영화 속 주인공인, 진(오다기리 조)이 꿈꾸는데로 행동하게 되는 란(이나영). 그들은 각자의 연인과 이별한 상태이지만, 진은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고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며, 란은 헤어진 연인을 죽도록 증오하며 꿈 속에서도 만나길 싫어한다. 그런 진의 꿈을 란이 실현하는 것이다. 란은 몽유의 상태에서 진이 꾸는 꿈을 실현하지만 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한다.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면, 몽유병 환자가 저지른 끔찍한 사건에 지나지 않았을 이야기지만 영화 속에서 그것은 '슬픈 꿈'으로 다시 태어났다. 감독은 꿈과 현실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꿈은 현실과 어느 부분 반드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혹 이런 것은 아닐까. 어쩌면 영화도 한바탕 꿈과 같고, 우리네 삶은 때론 영화보다 더욱 영화같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행위는 어쩌면 꿈을 꾸는 행위와도 비슷한 것일지 모른다, 는.
영화는 그렇듯 한바탕 꿈과 같다. 하지만 영화는 또한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그런면에서 <비몽>은 현실과 꿈(혹은 영화)의 모호한 경계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모든 경계에 있는 것들이 그러하듯이, <비몽> 또한 아름다움과 추함, 슬픔과 기쁨, 고통과 환희의 중간에서 서성거리는 자의 얼굴을 닮았다. 특유의 체념과 슬픔을 품은 채. 영화의 마지막, 진과 란의 마주잡은 두 손이 다소 허망하게 느껴지는 것도 다 그 때문이리라.
영화를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가 꾼 꿈이 다른 이의 현실로 나타난다는 설정도 설정이지만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영상이었다. 그러니까 일정한 서사나 대화로 무언가를 나타낸다기 보다 그저 말없이 보여줌으로써 그 이상의 것들을 표현해내는 것 말이다. 영화 전체가 마지막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세심하게 직조된 공예품처럼, 화면 가득 출렁이는 불교적 이미지와 나비의 이미지가 특유의 음악과 어우러져 묘한 아름다움을 풍겼다. 김기덕의 영화가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하면서도 이상하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다음에는 어떤 이미지들을 만들어 우리들을 유혹할 지 내심 기다려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