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박쥐

시월의숲 2009. 12. 10. 22:38

어제는 퇴근을 해서 볼링회 정기모임에도 가지 않고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를 보았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볼링회 모임에 이제껏 한 번도 빠지지 않았지만, 어제는 그냥 가기가 싫었다. 특별히 몸이 아픈 것도 아니고, 어떤 약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집에 와봤자 마땅히 먹을만한 찬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볼링회에 가면 볼링도 칠 수 있고, 저녁도 먹을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가기가 싫었다. 아무런 이유없이. 하긴, 가기 싫은데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며, 설사 있다해도 무슨 소용이었겠냐마는. 그냥 귀찮았다. 그냥.

 

그 귀찮음이 <박쥐>를 보게 한 것인가? 암튼, <박쥐>는 개봉했을 때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였는데 보지 못했다. 강렬했던 영화의 포스터가 생각난다. 확실히 영화는 상상이상으로 강렬했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내내 주인공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고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주인공들의 감정이 너무나 흩트러져 있는 느낌. 정리되지 않은 느낌. 깊이가 없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왜 상현(송강호)은 태주(김옥빈)를 그렇게 깊이 갈망하는가? 단순히 그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아니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만약 사랑하기 때문이라면 그저 관객들이 저들이 사랑에 빠졌구나, 라고 생각만 하면 되는 것인가? 왜 태주는 이해하지 못할 집안에서 이해할 수 없는 채로 그렇게 자신을 방치하고 있었을까? 하물며 라여사(김해숙)는 왜 한복집을 하고 있으며, 왜 매주 수요일마다 사람들을 불러 마작을 하는 것일까, 라는 어처구니 없는 의문까지 들었다. 그 모든 관계들과 감정들이 그저 피상적으로 파편화되어 있는 느낌, 스타일화 되어 있는 느낌, 이발소 통속화를 보는듯한 느낌, 알 수 없는 추상화를 대면하고 있을 때의 느낌,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묘한 느낌이 영화의 전체적인 인상을 괴상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렇다, 괴상함. 신기하게도 그 괴상함은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무척이나 짧게 느끼게 해 주었다. 이건 분명 영화의 장점이다. 아, 그리고 영화의 후반, 펄펄 뛰는 욕망을 마음껏 발산하는 태주 역의 김옥빈! 김옥빈만큼 태주 역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그녀의 눈빛과 하얀 피부와 붉은 피. 아, 그 환상적인 조합! 이 영화는 오로지 김옥빈을 위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송강호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박찬욱 감독 특유의 유머도 곧곧에 포진해 있다. 이 잔혹한 핏빛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 터지는 웃음은 정말 불가해하면서도 통쾌했다. 뱀파이어 살인마라는 설정은, 이전의 박찬욱 영화에 등장하는 현실 속에서의 살인자들에 비해 더 자유로운 쾌락이 부여된 캐릭터다. 감독도 다른 어떤 때보다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 더 즐거워하지 않았을까? 뱀파이어는 살인을 해야만 하고, 그것은 성적 흥분, 근원적 갈증의 해소,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그런 면에서 뱀파이어가 되고도 자신을 억누르는 상현보다 오히려 태주가 더 빛을 발하는 것일게다. 물론 뱀파이어에게는 태양볕 아래에서는 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맞이할 수 있는 영화의 결말은 무척이나 당연하면서도 재미있고 인상적이다. 하긴, 영원히 피에 대한 갈망을 거부할 수 없는 가련한 영혼에게 그 갈증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겠지만.

 

독특하고, 괴상하며, 잔인한데다, 웃기기까지 한 영화다. 그리고 상당히 강렬한 인상의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이런 뱀파이어 영화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으니. 볼링을 포기하고 본 영화치고는 꽤 탁월했다. 뭐, 볼링 마니아도 아니고, 또 영화는 나중에 봐도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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