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코끼리의 발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시월의숲 2009. 3. 16. 18:54

1.

무척 맑은 날씨. 낮에 패딩점퍼를 입고 거리를 걸었는데, 약간 덥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같은 날씨라면 모든 겨울 옷들을 장롱 속에 넣어두어도 좋으리라. 더위는 내가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지만,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찰나의 따스함은 좋아한다. 엄마의 품 같은 따뜻함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햇살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모든 사물을 어루만진다. 봄이 되면 자꾸 졸음이 오는 것도 아마 그런 햇살의 어루만짐 때문일 것이다. 실크보다 부드럽고 따스한 바람과 햇살이 어느 안마사 부럽지 않게 몸을 어루만지는데 어찌 가만히 깨어있을 수 있단 말인가!

 

 

2.

2009년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김연수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이라는 소설을 읽다. 오늘이 화창한 날씨였기 때문인지 어서 이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설은 화창한 날씨 속에서의 사뿐한 산책과는 달리 무거운 고통에 관한 이야기였다. '코끼리의 발' 같은 고통. 있지만 없는 것이어서 예측이 불가능 한 것, 자기 안에서 생겨나는 고름 같은 것, 이해의 껍질 같은 것은 없는 것, 그것, 고통 말이다. 이 작가는 언제부터인가(?) 제목을 길게 짓는 버릇이 생긴 것 같은데, 그렇게 긴 제목들을 붙이면서부터 소설도 더 재밌어진 것 같다(아,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아, 정말 실체가 없는 코끼리의 발 같은 고통이 내 심장을 밟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면 나는 어떻해야 하나. 산책을 하는 수밖에?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렇게 걷는 건지도 모르겠다.

 

 

3.

에두아르도 랄로의 음악을 알게 되다. 그의 스페인 교향곡과 첼로 협주곡. 세상엔 내가 모르는 멋진 음악들이 너무나 많다. 조만간 음반을 몇 개 구입해야겠다. 이런 음악들이 없다면 삶은 너무나 삭막하고, 나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저기 수없이 존재하는, 아직 읽지 않은 책들과 아직 듣지 않은 음악들에게서 나는 살아갈 힘을 얻는다. '코끼리' 같은 고통에 먹히지 않고. 그것들이 우주처럼 방대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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