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기차를 타고

시월의숲 2009. 4. 30. 19:08

1.

고작 나흘동안이었는데, 아주 많은 시간이 내게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린 느낌이다. 허탈하다거나 슬픈 감정은 아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겨우 마을을 찾아낸 나그네와 같은 심정이랄까. 과정이야 어떠했든, 무언가를 끝냈을 때 오는 피곤함과 시원함 같은 것이 내 안에 가득하다.

 

 

2.

3박 4일 일정으로 구미에 다녀왔다. 오고 가는 길에는 기차를 이용했다. 공적인 목적으로 가는 것이었지만 오랜만에 기차를 탄다는 생각에 약간 설레기까지 했다. 기차에 앉아서 바라본 풍경은 버스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반복적이고 리드미컬한 소리를 내며 우아하게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와 다혈질 기사의 브레이크에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불규칙적이고 다소 시끄러운 버스의 차이랄까. 물론 둘 다 낭만적인데가 있지만. 기차가 중간중간 생소한 이름의 역에 설 때면 일부러 고개를 들고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같은 역 건물을 정다운 눈길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마침 손에 들고 있던 함정임의 <나를 미치게 하는 것들>의 내용이 얼핏 떠오르기도 하였고. 그녀는 자신이 다녔던 여행에서 몇몇 역이 기억에 남는다고 하였던가.

 

 

3.

하지만 기차여행도 잠깐의 꿈처럼 끝이났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넘쳐나듯 내 시야로 들어오는 사람들, 사람들. 역시 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쉬 피곤해진다. 대구나 서울 같은 대도시는 아니더라도 구미 시내의 번잡한 도로와 차들, 사람들은 내게 충분한 갈증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연신 0.5ℓ 짜리 물병을 홀짝이면서 숙소를 찾아 헤멨다. 아, 마침내 찾아낸 모텔에 들어갔을 때의 그 안도감이라니! 역시 나는 촌사람의 기질을 타고난 모양이다. 만약 내가 서울의 가장 번잡한 곳, 사람들로 빼곡히 들어선 곳에 떨어진다면 나는 아마 그 자리에서 지쳐 쓰러질지도 모른다.

 

 

4.

집에 돌아와서도 쉴 수 없었다. 돌아오는 날 저녁에 제사를 지내야 했으며, 다음 날에는 밀린 빨래와 할아버지가 시키는 이런 저런 일들을 해야 했다. 다행히 일터는 다음주 수요일부터 출근이다. 눈치가 보였지만 그래도 하루 연가를 낸 건 잘 한 일인 것 같다. 나도 좀 쉬어야지.

 

 

5.

당분간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겠다. 그저 기차를 탔을 때의 그 느낌과 기차에서 바라본 풍경들과 지금은 잊어버린 작은 기차역들만을 떠올리자. 내게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다. 그 느낌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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