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누군가 그곳에 몸을 던진다하여도

시월의숲 2009. 4. 20. 17:16

1.

어제는 여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덥더니 오늘은 비가 내린다. 덕분에 시원한 기분이다. 집에 내려갔다가 올라와서 컴퓨터를 켜고 플래닛에 들어온다. 비가오니까 왠지 피아노 곡이 듣고 싶어서 플래닛에 심어놓은 피아노 연주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지정해 두고 반복해서 듣고 있다. 내리는 비와 피아노 선율, 제법 어울린다.

 

 

2.

영주에서 울진을 오려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구불구불한 산길, 불영계곡에 접어든 버스 안에서 차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산새는 험하고 계곡은 깊고 험준하며 길다. 이런 길을 지나야 울진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고립감이 느껴진다. 물론 안동에서 영덕으로, 영덕에서 울진으로 오는 바닷길도 있지만, 어쨌거나 울진은 같은 육지임에도 불구하고 섬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누가 그랬던가, 울진은 육지의 섬이라고.

 

 

3.

그렇게 깊은 계곡을 내려다보는 동안 버스는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 산길을 넘어갔다. 빗물로 얼룩진 창 밖으로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문득 저 아래로 내려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계곡으로 걸어들어갔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왜 그 계곡으로 걸어들어가야만 했는가? 깊은 계곡으로 들어간 그는 다시 돌아왔는가? 밑도 끝도 없는 공상이 차창에 부딪히는 빗물처럼 나를 적셨다가 멀어져갔다.

 

 

4.

내리는 비와, 그 비를 받아들이는 음험한 계곡과 험준한 산.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 계곡을 타고 흐르는 것은 장엄한 죽음의 기운이다. 설사 누군가 그 곳에 몸을 던진다하여도 아무도 의문을 품지 못하리라. 눈을 감으면 그 계곡으로 걸어들어가는 내 뒷모습이 보인다. 언젠가 내가 그 곳에 가게 된다면... 아... 이 모든 감상은 흐린 날씨와 비 때문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수하며 살자  (0) 2009.05.05
기차를 타고  (0) 2009.04.30
검은 바다  (0) 2009.04.15
누구나 다 그런 것일까  (0) 2009.04.14
보이지 않는 어둠  (0) 2009.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