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가족들

시월의숲 2009. 6. 7. 21:37

1.

어제 오늘 작은 아버지 댁에 다녀왔다. 어제 오후에 출발해서 오늘 새벽 첫차로 와서 그런지 하루종일 차만 탄 것 같은 기분이다. 멀기는 또 얼마나 먼지. 작은 아버지가 원주에 사놓은 땅과 집을 구경하고, 고기를 구워먹으며 술을 마셨다. 고작 어제 반나절일 뿐인 만남인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기분이 들기도 하고, 꿈처럼 현실감이 사라진 기분이 들기도 한다. 결코 원만한 관계라 할 수 없는 가족들이기에 이번 만남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지만, 비교적, 잘 마무리 된 것 같아 다행이다. 자연의 푸른빛이 어제 모인 가족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준 것일까. 아직은 갈 길이 먼듯 보이지만, 첫발을 내딛었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어야겠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2.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때때로 어떤 치명적인 약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의 생활, 아버지의 생각, 아버지의 행동, 아버지의 술버릇,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고독... 그 모든 것들에는 거역할 수 없는, 치명적이고 불온한 무언가가 스며있어 그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불안과 상처를 주는 것이다. 그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악마적인 무언가가. 그것은 일상생활 속에 잠복해 있다가 어느 순간 그 모습을 드러낸다. 어렸을 때부터 그것을 보아온 나는 매번 그 순간을 외면하고 싶었지만 이미 감염되어버린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어찌해야하나? 아버지를 키운 건 팔할이 술이요, 증오요, 분노다. 저 깊은 곳 어딘가 출렁이고 있다가 어느 순간 터져나와 주위의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버리는 붉은 혓바닥을 지닌 용암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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